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좋아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것 치고는 읽는 것에 그다지 성실하지 못하지만.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책 소지하고 다니기에는 꽤나 성실하다. 어디라도 나갈 일이 생겨 가방 속에 이것저것 때려 넣고 보면, 책이 가장 큰 부피 지분을 차지한다. 운 좋게 전자책을 읽고 있던 중이라면 그나마 부피는 많이 줄어든다. 이북 리더기는 스마트폰 두 개를 나란히 세워둔 정도의 크기로, 종이책에 비해 부담이 없다. 하지만 집요하게 챙겨 온 그 책들이 요긴하게 쓰인 적은 그다지 없다. 독서에 대한 불성실함이 늘 어김없이 발현되기 때문으로, 늘 책은 그렇게 짐으로만 남는다. 그렇지만 왠지 죄인이 노역을 하는 심정으로, 그 정도의 무게를 늘 기꺼이 감당하게 된다.
책을 펼치기에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할 것도 볼 것도 많은 세상이다. 손가락만 까딱해도 스마트폰이 온갖 정보와 음악과 동영상들을 끌어다 주는데, 그 유혹을 피하기란 그리 순탄한 일이 아니다. 그 쏟아지는 유혹의 미사일들을 피해 방공호로 들어섰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숨을 돌리고, 정신을 챙기고, 무기를 제대로 쥐고 하는 등의 일련의 준비를 마쳐야 그제야 환경에 익숙해져 볼까 하는 심정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수영 전에 준비 운동을 하는 심정으로 책을 가만히 노려본다. 스르르 눈이 감기거나, 어휴, 안 되겠다 하고 연필을 집어던지고 휴대폰을 쥐거나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책에 채 집중하기도 전에 진이 빠져서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이렇게까지 책을 읽어야 하나, 싶어 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마치 치악력을 가득 실어 깨무는 자라처럼 책을 물고 늘어졌다. 책 좀 그만 보라는 타박도 소용이 없었다. 공상 과학 소설 류를 좋아했더랬다. 투명 인간, 치티 치티 뱅뱅,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미래에 관한 소설들 같은 것들을 늘 가슴 언저리에 품고 살았다. 등교를 하자마자 가방을 자리에 던져 놓고, '학급 문고'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작은 원색 책장 앞에 서서 결국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를 고를 거면서도 한참을 고민하곤 했다. 고민 후에 집어낸 '애정 1호' 책을 글자 하나하나에 상상력을 실어 읽어 나갔다. 수업 종이 쳐도 그 상상력의 불길은 쉽게 진화되지 않았다. 진화할 생각도 없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책상 서랍 안쪽으로 읽던 책을 집어넣고 읽던 줄부터만 보이게 살짝 끄집어낸 후 고개를 한껏 숙이고 다시 책에 집중하곤 했다. 나름대로 치밀한 범죄 행각이었으나, 누가 봐도 몰래 책을 읽고 있는 꼴이었으므로 선생님은 나의 책상을 탕, 하고 치거나 저 멀리 교탁 언저리에서 '책 넣어라' 하고 주의를 줬다.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책을 서랍 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그 효과는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이내 다시 책을 꺼내 흘끗거렸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면 선생님도 무슨 방도를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나의 독서력에 대해, 그러니까 '책을 많이 읽는 건 좋으나, 수업 시간에는 조금 지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 하는 식으로 조금 유하게 토로했을 것이고, 엄마는 '네, 주의 주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강경책도 나에겐 그다지 효용이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작은 주의 정도로 끝난 걸 보면 엄마도 그게 그렇게 큰 문제라고는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엄마는 분명 내 독서 문제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로 골치를 썩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내가 1학년일 때는 국민학교였다.)에 입학함과 동시에 시작한 아기 옷 판매 장사의 매출이라거나, 그럼에도 나와 동생에게 밥을 먹여야 했으므로 오늘 저녁 메뉴 선정이라거나 하는 일상적인 문제들이, 소위 비행청소년들이나 할 법한 짓에는 포함되지 않는 나의 독서 문제보단 심각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나의 그런 독서 문제는 한참이나 더 이어진다.
이제는 그때의 그 열정도, 집중력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어떻게 그렇게 같은 책을 반복적으로 읽을 수 있었고, 그렇게 이야기 하나에 깊게 파고들 수 있었을까. 산을 오르는 중에 점점 공기가 희박해지는 것처럼, 나이를 오를 때도 그렇게 희박해지는 것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 대신 노련한 등산가들은 높은 곳에서 숨을 아껴 쉬는 나름의 요령을 한두 개쯤 가지고 있을 테지. 나도 그처럼 꾸준히 독서를 이어가는 나름의 요령이 있다.
뚜벅이 회사원에게 장점이 있다면, 그건 특정 시간대가 고정으로 할당이 된다는 점일 것이다. 출퇴근 시간 말이다. 물론 길고 지루한 시간이지만, 길고 지루하기 때문에 좋을 때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가방에서 책과 연필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읽어나가며 정성스럽게 줄을 긋는다. 물론 너무 피곤해서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 때도 있지만, 아무튼 손에는 책과 연필을 든 채로 졸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책과 연필을 꺼낸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보니, 이제 출근 시간만큼은 손에 책이 들려있지 않으면 마스크를 끼지 않고 밖으로 나선 것처럼 굉장히 어색하고 불편하다. 습관 일지, 강박 관념 일지. 그래도 기왕이면 느낌이 좋은 단어, 습관이라고 해야지. 그래, 독서 습관.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책과 연필을 꺼내고, 문장을 한 줄이라도 더 눈 속으로 집어넣으면서 줄을 그었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시간이 꽤 지난 지금. 나는 고민이 생겼다. 강박 관념, 아니, 독서 습관이 하나만 더 빼면 무너질 것만 같은 젠가처럼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그야, 재택근무를 하면 출퇴근 시간이랄 게 없다. 더군다나 그 자유로움은 나를 이불 더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고, 최후의 최후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독서 습관이 잠으로 치환된 셈이다. 쌓여 있는 책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어느 날, 단단히 옷이며 마스크를 껴입고 책을 가방 속에 넣고 밖으로 향해 보았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격리라도 당했는지, 책 읽고 싶은 마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결국 하릴없이 거닐다가 새빨개진 코와 얼음장 같은 손만 얻은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오늘 아침에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면 이불속에 3,40분은 더 안겨 있을 뻔했다. 하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애써 몸을 일으켰고, 내 방 책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이어리에 오늘 일정을 적어 나갔다. 이 의식만 치르면 어쨌거나 스톱 워치 시작 버튼이 눌린 듯 나의 하루가 반강제적으로나마 시작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정 사이에 '책 읽기'라고 꾹꾹 눌러서 적는다. 그 와중에도 왠지 휴대폰을 쥐거나, 이불속으로 다시 쏙 들어가거나 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으며 꾹꾹 끝까지 눌러서 적는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은 또 언제 책을 읽어야 할까.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언제 책을 읽을까. 퉁퉁 부은 눈을 꿈뻑거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