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과 눈과 옹졸함

1일 1커밋 #18

by 김디트

애인은 온갖 보수적인 권력 구조의 결함에 어김없이 당해 오면서,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정도는 늘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지금까지 억눌려온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세상 사람 좋은 표정을 할 때가 있다. 어제, 1월 7일을 기하여 애인은 또 한 번 그런 분위기를 한껏 발산했고, 나는 어이구 좋겠다, 좋겠다, 엉덩이를 뚜둥 뚜둥 하는 리액션을 취했다.


1월 7일, 기간제 선생님인 애인에게는 일 년에 두 번 있는 즐거운 날, 방학식을 치르는 날이었다.


'자유다!'


그렇게 날아온 애인의 톡은, 할 일을 끝내고 노닥이다가 끝내 조퇴를 할당받아 일찍 퇴근을 시작한 덕인지 더욱 활기차 보였다.


퇴근하는 사람과 업무 하는 사람의 간극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줄이기가 힘들다. 나는 날아갈 것처럼 구는 애인에게 나름대로의 뚜둥 뚜둥을 해주었지만, 마음은 이 업무 저 업무로 왔다 갔다 하느라 분주하기 짝이 없었고, 그 때문에 나의 리액션은 왠지 모르게 담백했다.


1월 7일을 기점으로 굉장히 추워진다는 뉴스를 들었기 때문에 나는 재택근무를 하는 중이었다. 조용한 노래를 커다랗게 틀어놓는 모순적인 분위기로 기분을 한껏 고양시킨 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물론 머릿속은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재택근무는 회사 컴퓨터 '원격 제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원격을 하면 늘 레이턴시가 골치 덩어리로 따라붙는다. 창을 조금 옮기기만 했을 뿐인데 내 잡념을 대표하기라도 하는 듯한 잔상들이 주르륵 화면을 덮었고, 그 때문에 모니터 화면은 옛날에 재미 삼아하던 '컴퓨터 부수기' 프로그램으로 한 바탕 마우스 질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답답한 화면을 붙들고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시간 상으로는 동생이겠거니, 했는데 정말 동생이었다. 보통 때라면 담담하게 '하이' 하고 손 정도 들어주는 선에서 인사가 끝났을 테지만, 수요일의 동생은 웬일인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손을 문지르며, 여민 패딩을 풀어헤치며, 그 재스쳐만으로도 나에게 뭔가를 어필하고 싶어함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 요구 사항이 뻔히 보이는데 무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일의 흐름도 끊기고 싶지 않아서 모니터를 가만히 응시한 채 물었다.


"뭔 일 있나?"


"겁나 춥다!"


동생은 패딩을 벗어서 소파에 집어던지고 있었다.


"밖에 눈 온다. 겁나 많이 온다."


"눈?"


'눈'이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박혀 있었지만 말이다.


마침 우리 집 보일러에 '물 보충' 표시가 깜빡이고 있었기 때문에 보일러에 물도 충전시킬 겸 잠깐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밖은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그 아우성의 주체들은 내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우리 집은 남산 케이블카로 가는 길목, 꽤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함박눈을 즐기기에 적당한 장소는 아니었고, 이 소리뿐인 썰렁함은 아마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 밑의 '재미로' 쪽에서는 사람들이 신나게 눈싸움이라거나 눈사람이라거나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으슬 으슬 떨리는 몸을 붙잡고 얼른 보일러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왠지 감상적인 마음이 되어서 사진을 한 방 찍었다.


애인은 톡이 없었다. 필시 아직 눈이 오는지 모르고 있을 터. 나는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집에 들어와서 이제 일을 다시 시작해 볼까, 하는 찰나에 애인에게서 '왜 전화했어?' 하고 톡이 날아왔다. 나는 그 유명한 눈 노래, '펄펄 눈이 옵니다'의 가사를 박자에 맞춰 '-' 표시를 넣어서 길게 길게 적어 나갔다.


'퍼얼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애인은 그 문장만으로도 즉시 나의 의도를 알아차린다.


'정마아아아알??'


나는 대꾸도 않고 노래를 이어 나갔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애인은 그 후로 룸메이트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가서 마치 눈 오는 날의 강아지처럼 실컷 뛰어놀고 사진도 찍고 즐겁게 보낸 모양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밤 시간 때 사진 뭉치를 와르르 보내왔다. 애인의 사진, 애인 룸메이트의 사진, 오늘 애인네 동네로 주소지 이전한 수많은 눈사람들의 사진. 애인이 신이 나서 눈사람들 중 어떤 눈사람이 가장 잘 생겼냐며 물어오길래, 기껏 그중 강렬한 인상의 눈사람 하나를 콕 집어서 이 아이가 가장 잘 생긴 것 같다고 말했더니, 그 이후로 연락이 없다. 오늘 보니, 실컷 놀고 들어온 탓에 진이 쭉 빠져서 그대로 기절해 버린 탓이었다.


회사로 출근한 사람들로부터 구해달라는 장난기 가득한 SOS 신호가 범람했고, 나는 그러게 재택을 하셨어야지요, 제가 춥다고 했지요? 껄껄 웃으며 재택근무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은 그칠 줄을 몰랐고, 열어둔 창문에서는 찬 공기가 한껏 밀려 들어왔다.


오늘이 되어서야 눈 때문에 어제저녁부터 난리가 났었더라는 뉴스를 접했다. 버스들이 줄줄이 한 곳에 묶여서 나가지 못했고, 자동차는 미끄러지고, 사람들은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넜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런 고행의 퇴근 시간을 가질 동안, 마을 사람들은 눈사람을 만들었고, 애인은 눈사람을 구경했고, 나는 재택근무를 종료하고 있었다.


겨울방학을 개시한 터라 시간이 남아돌던 애인은 그 시간을 십분 활용하여 인터넷의 개성 가득한 눈사람들을 잔뜩 긁어모아서 가지고 왔다. 0에 수렴하는 대한민국 출생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솔선수범으로 사람들이 많이도 나섰는지, 인터넷에는 개성적이고 예술적인 눈사람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잠시. 애인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어젯밤 하루 종일 눈길에 갇혀 고생한 사람들에 대한 뉴스를 긁어 왔다.


'뜨끈한 구들목에 앉아 있으니까 좋겠네!'


나는 오늘도 업무와 애인과의 소통과 업무, 그렇게 여러 가지 것들을 왔다 갔다 하느라 머리가 아픈 상태였고, 그래서 재택근무라 눈으로 인한 피해는 한 토막도 보지 않았으면서 괜히 부루퉁한 심정으로 톡을 했다. 애인은 꺄르르 꺄르르, 하는 글과 이모티콘을 스팸 뺨치게 보내왔다.


그래서 난 나 자신의 상태를 선언했다.


'나는 배알이 꼴린다!'


'왜 그런지 알아?'


'왜 그런데?'


'네가 옹졸해서.'


애인은 또 꺄르르 꺄르르 웃었고,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뭐,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는 심정이 들었달까. 하지만 역시 액면가 그대로 애인의 말을 받아들일 순 없었다. 그야, 애인은 겨울방학이었으니까. 나는 다시 부루퉁한 입술 끝을 핸드폰으로 가져갔다.


'아니야! 자꾸 놀리니까 그렇지!'


그러자 애인은 아니라고, 자신은 그냥 혼자 즐거워했을 뿐이라고 항변하기 시작했다.


22.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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