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한 대작병은 치료약이 없나
1일 1커밋 #57
게이머에서 개발자가 된 사람들은 하나쯤 마음에 심겨 있는 병이 있다. 어릴 때부터 조심조심 가꾸어온 나무의 열매 같은 것. 너무 맛있어 보여서 얼른 깨물어 먹으면 속이 설익어서 퉷, 금방 뱉어버리게 될 그런 것. 바로 대작병 말이다.
1세대 개발자 분의 글을 접했다. 그분의 포트폴리오 사이사이마다 그 단어, 대작병이라는 단어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번에도 결국 대작병을 이기지 못하고' 하는 식의 서술로 말이다. 단어는 얼핏 보면 마치 쉼표 같았다. 글을 리듬감 있게 만들어주듯 그분의 작업물들도 그 대작병이라는 단어 덕분에 일정한 리듬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 나의 레트로적 취향 때문에 3D로 넘어간 후의 작업물들엔 심드렁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그분의 첫 번째 작업물에 혀를 내두르며 존경심을 내비쳐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 포트폴리오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작업물에 대한 놀라움보단 그 작업물에서 언듯 새어 나오는 그 인고의 시간들에 대한 놀라움이 컸다. 혼자서 혹은 소규모로 정말 꾸준히 걸어온 그분의 길은 비록 조금 고루해 보였으나 탄탄하고 반짝거렸다.
게이머라면 아마 가슴에 품고 있는 게임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나는 유독 과거를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너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그 단 하나의 갓겜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시작점이 된 게임, 랑그릿사 2를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릴 적 엄마가 문방구에서 아마도 별생각 없이 집어 들어 내 가슴속에 꼭 쥐여준 그 타이틀은 정말 오랜 시간동안 내 게임 CD 보관함 속에 그야말로 모셔져 있었다. 한 장 잃어버리기라도 할라치면 금세 새로운 걸 구해와 채워 넣었고, 한글화가 된 나머지 시리즈도 푼돈을 모아 어떻게든 구비해서 그 컬렉션을 완성시켰다. 비록 가치가 있는 컬렉션은 아니었지만, 나는 종종 그 꼬질한 컬렉션을 뿌듯하게 바라보곤 했다. 아마 나의 다람쥐처럼 주워 모으는 습관 또한 그 시절의 그 뿌듯함에서 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많은 것들이 그 게임에서 시작되었구나, 한편으론 경탄스럽다.
그렇다고 그 랑그릿사라는 게임이 지금에 와서도 재밌고 즐겁고 완벽한 게임인가 하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옛날에 너무 감명 깊게 즐겼던 쯔꾸르 게임을 인터넷에서 우연찮게 발견했고 앉은자리에서 연속으로 엔딩을 봤다. 엔딩까지의 수고로움이 기성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 도저히 게임을 엔딩 보지 못하던 그 시절에는 엔딩을 본 것만으로도 어찌 보면 감동이었을 것이다. 그 감동에 시나리오의 비극적 요소까지 겹치니 얼마나 벅차올랐을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감동, 그런 안타까움은 없었다. 담담한 시선으로 엔딩을 바라보며 지극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게임의 면면을 비판했던 것이다. 고루한 개그, 급 전개되는 시나리오, 캐릭터 도트의 무성의함. 단점들만이 마음에 와 닿고 있었고,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내가 어른이 되고 말았음을 깨달았다.
오늘은 회사 사람에게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게임은 어떤 것이 있느냐고, 과연 나처럼 그 시절 옛날 게임을 언급할 것인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분은 곧장 파판 6를 이야기함으로써 나의 불안감을 조금 가라앉혀 주었다. 하지만 이내 곧 위쳐 3, 어새신 크리드 오딧세이 등을 이어 말함으로써 나처럼 과거에 못 박혀 있지 않고 지극히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냈고 나는 조금 시무룩한 마음을 참아내야 했다. 나만 레트로 한 게임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분위기에서 끊임없이 향수를 찾아 헤매고 있는 걸까. 이제 와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는 그 고전 게임과 재미있지만 로망은 없는 현재의 게임. 그 사이에서 타협점을 발견하여 끄집어낸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일까. 현실감 있는 3D 게임만을 추구하는 딱딱한 세상에 옛날 게이머들은 모두 잘 섞여 들어가고 만 것일까.
결국 눈곱만큼씩 만들어나가고 있는 내 게임에 마음이 미쳤다. 내 비루한 도트 실력, 하찮은 코딩 실력, 어리숙한 문장력들이 영화 사랑과 영혼에 나온 일그러진 도자기처럼 쓸쓸히 제자리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아마 나의 대작병이 산고의 고통 속에서 나오고 있는 중인 것이겠지. 나오면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일그러진 갓난아기의 두상처럼, 뭐 그런 이유로 이 게임도 쭈글쭈글 못생긴 것이겠지.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좀 너무 못생긴 것 같아. 그런 생각에 오늘도 이전에 만든 부분을 또 조금 손대면서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