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하게 말고 만사 게으르게

1일 1커밋 #3

by 김디트

요새 것들은 그런 경향이 많이 줄어든 것 같지만, 옛날에는 여러 창작물들에서 심심치 않게 맞닥뜨리는 키워드가 있었다. 그건 바로 '노력'. 그 창작물들, 만화책들은 노력을 가벼운 뉘앙스로 쉽게 쉽게 소비했다. 주인공의 노력은 서너 장의 연출로 치환되곤 했다.


그 덕분에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노력'이라는 걸 너무나 가볍게 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거기에 더해, 엄마가 공공연히 '얘는 하면 되는 애니까' 하는 둥의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는 것도 알고 있는 상황. 그 모든 주위 상황 덕에 어린 나는 노력 한 번 제대로 안 해본 채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까짓 거, 하면 되잖아? 아직은 안 했지만.'


'한다'는 것에 수도 없이 많은 난관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모를 수밖에. 해보질 않았으니까. 내 주위의 어른들은 모두 집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가지고 있으니까 나도 어른이 되면 당연히 집을 가지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진짜로 해야 하는 때는 온다. 학창 시절에는 단연 시험 기간. 사실 시험 기간에 '해야 한다' 하게 될 정도의 상황이면 이미 늦은 거나 다름없으나, 분위기 상, 그러니까 다들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직전, 슬로 모션 안에서 '안돼애애애애-'하고 외치는 것 외에 뭐든 하려고 허둥지둥하는 게 짐짓 당연한 시험 기간의 분위기 상, 그제야 '해야 한다'라고 여기는 데는 그다지 죄책감이 없다. 되려 당당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벼락치기는 대개 효용이 없다. 있을지도 모르지만, 늘 실패한 나로선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실패한 성적표를 들고 또 이렇게 생각한다.


'그까짓 거, 하면 되잖아? 이번에는 귀찮아서 안 했지만.'


그 '귀찮다'는 허들도 실은 '한다'는 것 안에 포함된 수많은 난관 중의 하나임을 간과한 생각이었다. 이 두 가지를 연관 짓지 못하는 이상, 다음의 결과도 뻔했다. 실제로도 뻔했고.


그 후 무럭무럭 자란 나는, 나를 강제하는 학교도, 엄마도 없는 냉혹한 세계에 세차게 내던져진다. 처음에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이 하수구를 통과한 후 폭우 속에서 환호하듯 손을 뻗치는 딱 그런 심정이었지만, 마음이 차분해지고 지갑도 차분해지고 잔뜩 날이 선 주변 환경, 그리고 앞서 나가는 사람들, 뭐 그런 것들을 인지하고 난 후에는 전혀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싶지 않고, 결국 폭우만 남아서 나를 흠뻑 적셨다.


누구도 시키지 않는 일을 스스로 해야 했다. 스스로 도태되지 않으려면, 아무튼 뭐든 해야 했다. 사막에서 바늘이라도 집는 심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이것저것 모아야 했다. 그 어릴 적, 만만하게 보던 '한다'를 '지속적으로' 해야 했다. 그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몰려 들어오는 불안감을 줄여보고자. 그렇지만 잠깐잠깐 점멸하듯 이어가는 학습 만으로는 성취감을 얻지도, 당장의 불안감을 지워주지도 못했다.


정말 많은 실패를 했다. 옆에 침대가 있고, 휴대폰이 있는데 어떻게 다른 걸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직 중학생일 때였다. 내 고향 경주는 시골이었던지라, 중학교는 평준화가 되어 있었지만, 고등학교는 아직 성적순으로 줄 세워서 갔었다. 엄마는 분위기 때문이라도 고등학교는 좋은 곳을 가야 한다고 몇 번을 당부하듯 말했고, 여전히 까짓 거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등학교가 그렇게 중요할까? 분위기가 정말로 중요한 걸까?


중요했다. 펼쳐둔 책을 뒤로하고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 중요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도서관, 적어도 카페였다면 아직까지 내 집중력을 책에 묶어둘 수 있었을 거란 사실도 이젠 안다.


수도 없는 실패를 겪다 보면 차츰 나아지는 부분도 생기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에는 매년 플래너를 꾸며 나가면서, 그리고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는 선의 가벼운 강박감 안으로 날 밀어 넣으면서 몇 가지를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토이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고, 매일 몇 장이나마 책을 읽으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운동을 한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한 단계 올라섰다는 걸 인지하고 나면 조금은 오만해질 때도 있는 법이다. 다크 소울 엔딩을 보면서 괜히 혼자 어깨를 으쓱하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우직한 상태로 제법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통 이상하다. 내 토이 프로젝트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책 너머의 것을 보는 것에도 통 익숙해지지 않으며, 몸매의 형태도 영 지지부진하다. 정체된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있는 것만 같다. 가긴 가는건가? 창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앞을 바라봐도 알 수 있는 거라곤, 내가 이 교통 정체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 뿐.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 그러니까 일 년 전쯤일까. 판교 스포츠 센터 헬스장을 이용할 때였다. 트레이너 쌤과 꽤 친해진 덕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나의 운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늘 같은 루틴으로 하지 말고, 종종 바꿔서 하세요."


왜 그래야 하냐고 굳이 되묻진 않았다. 실은 나도 유튜브 등지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몸이 루틴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이전의 자극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몸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참, 새로운 루틴이라는 건 굉장히 귀찮은 일이다. 새 루틴을 고민하고, 그 루틴에 또 나의 운동 흐름을 맞춰가고, 그런 과정들은 생각만 해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죠, 하고 웃으며 대답하고, 그뿐이었다.


또 다른 예. 흔하디 흔한 자기 계발서들은 종종 이런 식으로 운을 뗀다.


"게을러져라."


오늘도 책 몇 장 보다가 말고 침대에 누워서 폰이나 하고 있는 노릇인 게으른 나는 일순 솔깃하다. 하지만 몇 자 읽어 나가면 그제야 책은 본심을 드러낸다. 내 기대완 다른 논리를 펼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런 논리다. 귀찮게 매번 기계처럼 쓸데없는 일을 반복하는 데 용력을 쏟지 말고 그 반복들을 줄여서 더 게을러져라. 아니, 그 반복들을 줄여나가기 위해 고민하고 개선하는 게 귀찮아서 게을러지는 거라고요. 투덜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그런 이야기다. 뻔한 자기 계발서가 주워섬기는 이야기나, 다양한 운동 루틴에 관한 이야기나, 결국 내가 해야 하는 건 단 한 가지였다. 그렇지만, 나는 귀찮았다. 그런 이유로 지지부진한 나의 그 우직함들은 아직 쳇바퀴 안에 있다.


자, 알긴 아는데. 짐짓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눈썹은 약간 뒤틀린 채다.


그리고 오늘도 결국 이렇게 생각하고 만다.


'그까짓 거, 하면 되잖아?'


21.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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