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의 손길에 얼굴이 상기되고 말았다
1일 1커밋 #68
날이 많이 풀렸다. 덩달아 풀렸던 미세먼지들도 내 기분을 염려했는지 조금 사그라들었다. 창 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이 늘어났다. 잠깐 짬이 나서 정신을 놓쳤다 잡을 때마다 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필 회사 앞에는 공원이라, 햇빛을 잔뜩 받으면서 길 위를 미적거리며 나아가는 사람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엄청 여유로운 몸짓들이라 괜히 심통이 날 지경이었다.
봄이었다. 혹독했다고 하긴 힘들었지만, 아무튼 살이 에는 듯한 몇몇 날씨들을 지나쳤고, 두꺼운 옷 몇 가지를 마치 군대 불침번 순서처럼 로테이션시켰다. 그렇게 몇십 번 옷가지 앞에서 고민하는 나날들을 보내다 보니 봄이었다. 이제는 길고 두꺼운 롱 패딩으로 패션을 후려치는 것도 불가능해지고 있었고, 그래서 옷가지 앞에서 곰곰이 턱을 괴는 시간이 늘어났다.
오늘은 회사 동료분이 이번 주말에는 잠깐 동네 마실 겸 나가서 벚꽃을 구경해야겠다며 쇼핑몰을 열었다. 역시 결심 후에는 결심의 증거를 구비해야지. 동료분은 멋들어진 라탄 피크닉 가방들 사이에서 마우스 커서를 방황시키고 있었고, 나도 함께 감탄했다. 요새는 참 이쁜 것들이 많이 나오네요. 근데 뭐 싸서 나가시게요? 하니 김밥..? 하고 대답이 돌아왔다. 결심의 증거는 심벌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난 내 실수를 인정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인 채 내 자리로 돌아왔다.
몽글몽글한 감정이 퐁퐁 솟아올랐다. 아마 봄이라서 그럴 것이다. 이 기분은 어디서 온 걸까. 헨델과 그레텔이 흘려놓은 빵 부스러기를 훔쳐먹는 심정으로 가만히 되돌아보았다. 기분 좋은 봄바람인 것 같기도 하고 언뜻 이제 막 팝! 하고 터진 팝콘들이 흩어진 것처럼 보이는 벚꽃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아마 복합적인 이유일 테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이유였다. 거기에 얽혀 있는 옛날 기억들 때문이었다. 군대에서 깊고 어두운 혹한의 터널을 막 지났을 때, 식당에서 식판을 씻으면서 느꼈던 간질간질한 봄바람의 기억, 친구들과 함께 벚꽃놀이하러 자전거를 타고 가던 기억. 그런 것들이 뿌요뿌요처럼 연쇄적으로 폭발해서 몽글몽글몽글, 수면 위로 떠오른 탓이었다.
그렇다면, 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옛날 그 어릴 때는 겨울의 첫눈이, 봄의 새싹이, 따뜻한 첫 봄 손길이 왜 그렇게 설렜던 걸까. 돌이켜볼 기억보다 앞으로의 인생이 더 설렜던 그 시절에는 대체 어떤 연유로. 잠깐 고민해 보았지만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그야 나는 이제 그 시절의 내가 말하던 '아저씨'가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내가 아빠를, 아빠가 나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딱 그 이유로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과거가 궁금할 거였으면, 이렇게나 과거의 것들에 얽매여 살 것이었으면 그림일기라도 제때 쓰고 제대로 간직해 둘걸 그랬다.
그 정도까지 생각하다가 창문 작은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봄바람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과거의 내가 이해하지 못할 지금의 업무들이 산더미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