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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뉴 Dec 12. 2021

부모는 어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엄마는 나에게 종종 그런 얘기를 하셨다. 아기를 낳으면, 얘가 진짜 내 아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들입니다!" "딸이네요~" 두 번의 출산. 엄마의 그 말은 차가운 분만실에 누워 갓 태어나 벌건 탯줄을 줄줄이 달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훅훅 스쳐 지나갔다. 저것(!)이 내 자식인가? 아이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는 엄마들도 있다는데, 나에게 그렇게 드라마틱한 감정은 찾아오지 않았다. 철저히 분리된 감정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녔다. 아, 내가 아이를 낳았구나. 그것은 감정적이기보다는 더없이 사실적이었다.


본능적으로 양육과 보호에 대한 의무는 있었지만, 그에 대한 과정을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살면서 동물 한 번 키워본 적이 없는 나에게, 열 달 동안의 마음에 준비에도 불구하고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기를 키우는 것은 너무나도 큰 일이었다. 아기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아이의 성장에 따라 옷을 구매하고 기저귀의 사이즈를 바꾸었다. "아직 이유식 시작 안 하셨어요?" 어린이집 엄마의 한 마디에 미음을 시작했다.


눈앞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구는 아이들. 저들끼리 즐거운 듯싶다가도 갑작스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칭얼거림을 달래기 위해 아이의 겨드랑이를 끼고 올려 어깨에 들쳐 안으면, 어느새 힘을 스르르 빼고 나의 쇄골 언저리에 이마를 갖다 댄다. 저녁밥 준비를 미처 멈추지 못하고, 첫째의 치카를 미루지 못해서, 그렇게 아이 하나를 미천한 팔근육에 의지한 채 이래저래 '볼일'을 처리하다 보면 가끔 섬뜩한 느낌이 든다. 어떻게, 아이란 존재는 이렇게 보호자의 앞에서 본인의 무방비함을 여지없이 드러낼 수 있는 걸까?


학대받는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본인을 학대하는 대상에게 오히려 애교를 부리거나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오직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아이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라면 당장이라도 도망칠 텐데. 그렇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부모에게 본인의 모든 것을 내건다. 그들이 아이들 태초의 보호자이기에. 나는 그것을 시나브로 느끼면서 번뜩, 막중한 책임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어른이 되는 걸까? 스무 살이 되어 인생의 모든 리미트가 해제되면 그것이 어른의 징조가 되는 걸까? 성인의 날, 만 스무 살에 장미꽃과 향수를 받아 들면 이제 어른의 사명을 가져야 하는 걸까? 서른이 훌쩍 넘어 애엄마가 되어도 난 술자리가 그리운데. 아직 배워야 할 술 게임도 한이 넘치는데. 여전히 철없이 살고 싶은데, 그럼 나는 이 마음가짐만으로 아이처럼 살아도 되는 걸까?


첫째와 비슷한 나잇대의 외동아들을 키우고 있는 동생과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더 이상 자라고 싶지 않은데,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계속 계속 자라고 있는 것 같아." 자녀가 없는 성인들은 여전히 철이 없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미혼의 나는 그것을 모욕으로 생각했다. 뭐래. 애 없는 게 죈가. 그럼 애 낳는 건 엄청난 건가. 지금의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그것은 일종의 부러움이다. 서른이 넘어도, 마흔이 되어도 아이처럼 지낼 수 있는 것. 책임질 목숨이 없기에 비로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자녀가 없는 것, 그것은 이 지구 상에서 평생 '누군가의 아이'로만 남을 수 있는 특권이다.


'OO이 어머님, XX어머님'. 여전히 그리 좋아하는 호칭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부름에 대답한다. 나의 아이의 보호자. 내 앞에서 한없이 무방비해지는 아이들을 두 팔로 그러안으며, 나는 어른의 호칭을 얻었다. 발아래에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나는 그렇게 상대적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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