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4 개봉영화 <창밖은 겨울>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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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겨울이다. 늘 그렇듯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다. 그 여름밤이 차라리 뜨거웠더라면 구릿빛으로 탄 피부와 사진 몇 장 정도라도 남겠으나, 여름밤 최선을 다해 놀지 않은 이들에게 겨울은 허무와 함께 찾아온다. 내가 올여름에 뭐 했더라.
그렇다. 올여름엔 코로나에 걸렸다. 너도나도 다 걸릴 그때 코로나로 격리하고 나니 처서였다. 여름이 끝났다는 신호. 여름에 실컷 놀지 못해서 이렇게 덥썩 찾아온 겨울이 꼭 날강도 같다.
지금은 2022년이다. 창밖에는 겨울이 오고 있다. 며칠간 이상하리만큼 더웠는데, 소설(小雪)에 접어든 오늘은 어쩐지 쌀쌀하다. 저녁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
<창밖은 겨울>이 상영되는 동안 지금이 2022년인지 2002년인가 싶었다. 레트로 감성이 아니라 지독히도 옛날의 문법인 것이다. <무진기행>에서부터 홍상수로 이어지는 늙은 소년의 성장담. 찌질한 남자의 자기연민.
한때는 영화감독을 꿈꾸었으나 고향 진해로 내려가 버스기사로 일하는 공석우. 버스 운전하고, 동료들과 점심 먹고, 탁구치는 거 구경하고, 퇴근하는 성실하고 밋밋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터미널에서 낡은 mp3 하나를 줍는다. 유실물 보관소 담당 직원 영애는 유실물에 큰 관심이 없다. 잃어버린 첫날에 찾아가지 않으면 결코 주인이 나타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우는 mp3 주인이 찾아왔는지 연신 유실물 보관소를, 영애가 일하는 매표소를 들락거린다. 잡담도 없고 사담도 없이, 오직 '주인이 나타났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영애는 그런 석우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마침 유실물 보관소를 직원 휴게소로 전용하느라 유실물들을 비워야 하는 상황. 석우는 mp3를 고치려고 진해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영애는 그런 석우를 따라다닌다.
석우의 주장은 mp3가 잃어버린 물건이므로 주인이 곧 찾으러 올 것, 영애의 주장은 버린 것이니 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식처럼 mp3와 전 여자친구와의 추억이 상기된다. 아침 7시 라디오를 듣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이유로 헤어짐을 고한 전 여자친구.
예술하는 사람 중 일부의 바이오리듬은 직장인들과 완전히 다르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엉금엉금 작업하다 밤을 꼴딱 새우고, 또 오후쯤이나 일어나 엉금엉금...의 반복. 아침형 인간이 무조건 훌륭할 수 없고, 올빼미형 인간이 게으르다 말할 수 없다. 다만 성향 차이일 뿐이다.
석우의 전 여자친구는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석우도 영화를 그만둔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 전 여자친구는 여전히 영화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영애가 한때는 탁구선수였다는 것. 이러한 사실들은 너무도 가치 없게 지나가버린다.
영애는 발군의 탁구 실력을 보여준다. 석우를 따라다니다 별안간 대회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석우도 별안간 복식조로 대회에 나가자고 한다. 영애가 대회에 나가기로 한 건, 중학생 때 아버지를 피해 그만둬버린 탁구에 미련이 남아있는지, 후회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중요한 탁구대회를 석우는 전 여자친구에게 걸려온 전화 때문에 망쳐버린다. 물러터진 인간이여.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따위의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영화감독을 그만둘 때도 석우는 그러했으리라 짐작된다. 전 여자친구의 이별선언에 그렇게 중요했던 꿈을 망쳐버렸을지도. 전 여자친구의 말처럼 아침 7시 라디오를 듣는 직업을 선택하고, 전 여자친구가 잃어버린 듯한(원래는 자기 것이었던) mp3를 주워다 동분서주하고. 사실 제일 중요한 건 눈앞의 탁구대회였는데 말이다.
잃어버린 mp3가 표상하는 석우의 꿈(과 영애의 탁구 살짝), 버린 것이라는 영애의 태도와 잃어버린 것이라는 석우의 태도에서 꿈과 과거에 대한 미련 따위는 가볍게 은유된다.
영화에서 석우는 영화감독 되기에 실패하고 낙향한, 그러나 버스기사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누군가 잃어버려서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mp3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남자다.
전여자친구는 무엇인가. 석우를 자극하는 존재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아를 흔들고 버스기사로 안정적인 삶을 일구는 석우를 흔들어놓고 사라지는 존재. 갑자기 나타난 mp3 같은.
영애는 무엇인가. 갑자기 석우에게 관심을 가지는 자다. 별 맥락도 없이 석우를 졸졸 따라다니고, 같이 탁구를 치자고 하고, 귤을 나눠 먹고, 영애 본인에게 너무나 중요했던 탁구대회를 완전히 조져놓은 석우에게 일언반구 하지 않는 사람.
마지막으로 어머니까지. 석우를 기다려주는 홈 스위트 홈이자 영화와 관련된 짐을 정리할 때 마지막까지 석우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는 자.
모든 여자는 석우를 위해 존재한다. 석우를 좌절시키고, 석우를 위로하고, 석우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력자다. 전 여자친구의 사정, 영애의 사정, 석우 부모의 사정은 딱히 중요하지 않다. 하물며 아버지와의 졸혼을 선언한 어머니마저도 졸혼선언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석우의 잃어버린 사랑과 잃어버린 꿈, 그럼에도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석우를 응원해야 하는 104분이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결국 현실을 선택해야만 했던 우리네 남성들의 회한.
버려야 할 건 잃어버린 mp3가 아니라 예술하는 이의 자기연민이다. 영화를 소개하는 "아주 보통의 청춘들의 자화상"이라든가, "다 괜찮아!" 등의 문구와 자기연민을 어떻게 떼어놓을 수 있을까. 물론 긍정은 좋고 청춘도 너무 좋은 말이긴 하지만...
영화에서 좋았던 점이라면 각종 매체에서 극화하는 경상도 사투리를 정말 본토발음으로 구사했다는 점이다. 지역에서 영화를 찍는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내가 나고자란 지역의 말이 매체의 필터를 투과하지 않고 나오는 모습, 꾸며지지 않은 사투리 그 자체를 듣는 즐거움이 있었다. 대충 동향인 분들이 영화를 보며 제법 즐거워하시리라 기대된다.
결말은 영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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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은 겨울(When Winter Comes)
감독 : 이상진
출연: 곽민규, 한선화
상영시간: 104분
*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