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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Mar 06. 2020

역마와 소외

이번 생은 집순이 되기 틀려먹었다

요며칠 일이 바빴다.

배달을 나가지 못했더니 몸이 근질근질한 걸 보니 천상 배달부가 체질인 것 같기도 하다. 배달부가 체질이라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내재된 역마살 탓일지도.


어쩌다 보니 앉아서 하는 일을 하는데, 뭐,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일을 하긴 하지만. 종일 작업실에 앉아 있는 게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그다지 에너지가 많은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잉여 에너지를 주체하지를 못한다. 작업을 하면서 사용하는 에너지가 너무나도 적은 걸까.


전 세계에 전염병이 창궐한 이때,

다들 집순이 집돌이가 되어 바깥 출입을 삼가고 있다. 나는 어쩌다 보니 확진자와 접촉하지도, 위험한 곳에 가지도 않았으면서 자발적인 자가격리자가 되었다. 사실 전염병 사태 전에도 늘 격리 비슷한 상태다. 회사를 나가지 않으니까 당연하다.


역마란 뭘까.

사주에 역마가 있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또 며칠 전 관상 좀 본다는 사람이 역마가 없다는데 뭐가 더 맞는지는 모르겠다. 고향을 떠나왔고 또 프리랜서로 계약 및 작업을 하면서 이곳 저곳을 떠돌았고, 강의 차 다닌 곳만 해도 열 손가락이 부족하니 역마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매일 작업실에 8~9시간씩 앉아있는 걸 보면 역마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저 밖으로 나돌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사람일지도.


한때 나는 자취생의 전형적인 삶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1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 같은 내 삶은 너무 지루하고 재미라곤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하고, 야식으로 치킨도 한번 시켜보지 못한, 지루한 삶. 만화책도, 게임도 안 좋아하니 유흥이라고는 술 마시는 것뿐.


집순이가 되어보고 싶었다.

느즈막이 일어나 이부자리에서 뒹굴뒹굴하다, 귀찮게 밥을 안치지 않고 배달 앱에 들어가 맛있어 보이는 걸 시켜 먹고. 집에서 게임을 한다거나 만화책을 잔뜩 쌓아둔 채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뭐 그런 것도 로망이라면 로망이었다.


하지만 천성이 그러질 못하니,

집에 있으면 재미가 없다. 어차피 밖에 나간다 해도 내가 시쳇말로 '인싸'도 아니고, 친구를 만날 것도 아니니 큰 재미도 없는데도 그렇게 밖에 나가고 싶다. 집에 있으면 닭장에 갇힌 닭이 된 것만 같다. 날개 한번 퍼덕거릴 공간도 없이 꼼짝도 못하는 그런 닭.


그래서 배달을 나가면서도 참,

집순이 집돌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정도면 그냥 나가서 포장해와도 되지 않을까?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만큼 그들도 편하고 안전한 집에 있지 않고 밖으로 나돌려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난 집순이 되긴 틀려먹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어제, 며칠만에 배달을 나갔다.

메뉴는 부대찌개 2인분. 현관문 앞에 고급스러운 소나무 분재가 한 그루 있었다. 지금까지는 배달 갔던 집과는 약간 다른 분위기. 하지만 현관을 열기 전까지는 안에 누가 사는지 모르니까 그저 건물주가 갖다 놓은 건가 했다.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고객이 문을 열고 나왔는데(배달 앱에서 배달부의 현위치를 알 수 있다) 연세가 제법 되어 보이는(아주머니-할머니 사이쯤) 분이었다.  


조금 놀랐다.

지금까지는 배달 간 집에 젊은 사람들밖에 없었다. 혼자 살든, 누군가와 같이 살든 다들 많아봐야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의 집이었다. 부끄럽게도 높은 연령층이 배달주문을 하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 어쩌면

이 편한 걸 우리만 누리고 살았구나 싶기도 했다. 우리 바로 윗세대, 엄마 아빠 세대는 이런 걸 몰라서도 안 하겠구나. 음식배달뿐만 아니라 새벽배송이니 로켓배송이니 하는 것들도 몰라서 못하겠다 싶었다. 왜, 키오스크 매장과 노인소외에 대한 이슈가 한창 나오않았는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게 맞기나 한 걸까.

우리 할머니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경험했고, 집에 한 대 있는 TV에 채널이 딱 3개밖에 나오지 않으며, 당연히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마을에서 읍으로 나가는 버스도 하루에 몇 대 없는 곳에 사신다.

우리 엄마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만 온라인 결제 같은 건 못 하시고, 서치 정도는 자유롭게 하는 정도. 키오스크 주문 같은 것도 할 줄 모르고 한 적도 거의 없다.

나는 스마트폰 없으면 못 산다. 당연히 일도 못하고, 우리 또래가 다들 그렇듯 손에 폰이 없으면 불안한 전형적 현대인이다. 대면보다 비대면이 훨씬 편하다는 것도 포함된다.


삼 대의 동시대가 과연 같은 세상인가.

내가 늙으면 세상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유치원생 때부터 코딩을 배운 아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놓을지 심히 기대되면서도 두렵다.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다 결국 주문을 포기하는 노인들처럼 나도 어떤 거대한 벽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게 될 것만 같다.


나의 역마는 몇 살까지 이어질까.

내가 노인이 되어도 그렇게 밖에 나가고 싶을까? 밖에 나갔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하지. 나 역시 어떤 일부 노인들처럼 집회에 나가 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으며 미미하게 남은 내 존재를 겨우 확인하게 될까. 공원을 한 바퀴 걷고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어져 커피집에 들어가 나를 가로막는 커다란 기계 앞에서 무력하게 돌아서게 될까.


그날이 더디게 오도록 막을 수는 없으니

내가 빠르게 배워야 하는 게 맞긴 한데 그냥 조금만 기다려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뒤에서 차례를 젊은이가 나를 조금만 기다려주고 내가 쩔쩔맬 때 약간의 다정함으로 사용법을 알려주면 좋겠다.


난 그때도 집구석에 잠시도 못 앉아 있는 노인이 되어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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