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을 나가지 못했더니 몸이 근질근질한 걸 보니 천상 배달부가 체질인 것 같기도 하다. 배달부가 체질이라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내재된 역마살 탓일지도.
어쩌다 보니 앉아서 하는 일을 하는데, 뭐,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일을 하긴 하지만. 종일 작업실에 앉아 있는 게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그다지 에너지가 많은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잉여 에너지를 주체하지를 못한다. 작업을 하면서 사용하는 에너지가 너무나도 적은 걸까.
전 세계에 전염병이 창궐한 이때,
다들 집순이 집돌이가 되어 바깥 출입을 삼가고 있다. 나는 어쩌다 보니 확진자와 접촉하지도, 위험한 곳에 가지도 않았으면서 자발적인 자가격리자가 되었다. 사실 전염병 사태 전에도 늘 격리 비슷한 상태다. 회사를 나가지 않으니까 당연하다.
역마란 뭘까.
사주에 역마가 있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또 며칠 전 관상 좀 본다는 사람이 역마가 없다는데뭐가 더 맞는지는 모르겠다. 고향을 떠나왔고 또 프리랜서로 계약 및 작업을 하면서 이곳 저곳을 떠돌았고, 강의 차 다닌 곳만 해도 열 손가락이 부족하니 역마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매일 작업실에 8~9시간씩 앉아있는 걸 보면 역마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저 밖으로 나돌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사람일지도.
한때 나는 자취생의 전형적인 삶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1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 같은 내 삶은 너무 지루하고 재미라곤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하고, 야식으로 치킨도 한번 시켜보지 못한, 지루한 삶. 만화책도, 게임도 안 좋아하니 유흥이라고는 술 마시는 것뿐.
집순이가 되어보고 싶었다.
느즈막이 일어나 이부자리에서 뒹굴뒹굴하다, 귀찮게 밥을 안치지 않고 배달 앱에 들어가 맛있어 보이는 걸 시켜 먹고. 집에서 게임을 한다거나 만화책을 잔뜩 쌓아둔 채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뭐 그런 것도 로망이라면 로망이었다.
하지만 천성이 그러질 못하니,
집에 있으면 재미가 없다. 어차피 밖에 나간다 해도 내가 시쳇말로 '인싸'도 아니고, 친구를 만날 것도 아니니 큰 재미도 없는데도 그렇게 밖에 나가고 싶다. 집에 있으면 닭장에 갇힌 닭이 된 것만 같다. 날개 한번 퍼덕거릴 공간도 없이 꼼짝도 못하는 그런 닭.
그래서 배달을 나가면서도 참,
집순이 집돌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정도면 그냥 나가서 포장해와도 되지 않을까?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만큼 그들도 편하고 안전한 집에 있지 않고 밖으로 나돌려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난 집순이 되긴 틀려먹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어제, 며칠만에 배달을 나갔다.
메뉴는 부대찌개 2인분. 현관문 앞에 고급스러운 소나무 분재가 한 그루 있었다. 지금까지는 배달 갔던 집과는 약간 다른 분위기. 하지만 현관을 열기 전까지는 안에 누가 사는지 모르니까 그저 건물주가 갖다 놓은 건가했다.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고객이 문을 열고 나왔는데(배달 앱에서 배달부의 현위치를 알 수 있다) 연세가 제법 되어 보이는(아주머니-할머니 사이쯤) 분이었다.
조금 놀랐다.
지금까지는 배달 간 집에 젊은 사람들밖에 없었다. 혼자 살든, 누군가와 같이 살든 다들 많아봐야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의 집이었다. 부끄럽게도 높은 연령층이 배달주문을 하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 어쩌면
이 편한 걸 우리만 누리고 살았구나 싶기도 했다. 우리 바로 윗세대, 엄마 아빠 세대는 이런 걸 몰라서도 안 하겠구나. 음식배달뿐만 아니라 새벽배송이니 로켓배송이니 하는 것들도 몰라서 못하겠다 싶었다. 왜, 키오스크 매장과 노인소외에 대한 이슈가 한창 나오지 않았는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게 맞기나 한 걸까.
우리 할머니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경험했고, 집에 한 대 있는 TV에 채널이 딱 3개밖에 나오지 않으며, 당연히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마을에서 읍으로 나가는 버스도 하루에 몇 대 없는 곳에 사신다.
우리 엄마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만 온라인 결제 같은 건 못 하시고, 서치 정도는 자유롭게 하는 정도. 키오스크 주문 같은 것도 할 줄 모르고 한 적도 거의 없다.
나는 스마트폰 없으면 못 산다. 당연히 일도 못하고, 우리 또래가 다들 그렇듯 손에 폰이 없으면 불안한 전형적 현대인이다. 대면보다 비대면이 훨씬 편하다는 것도 포함된다.
삼 대의 동시대가 과연 같은 세상인가.
내가 늙으면 세상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유치원생 때부터 코딩을 배운 아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놓을지 심히 기대되면서도 두렵다.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다 결국 주문을 포기하는 노인들처럼나도 어떤 거대한 벽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게 될 것만 같다.
나의 역마는 몇 살까지 이어질까.
내가 노인이 되어도 그렇게 밖에 나가고 싶을까? 밖에 나갔는데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하지. 나 역시 어떤 일부 노인들처럼 집회에 나가 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으며 미미하게 남은 내 존재를 겨우 확인하게 될까. 공원을 한 바퀴 걷고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어져 커피집에 들어가 나를 가로막는 커다란 기계 앞에서 무력하게 돌아서게 될까.
그날이 더디게 오도록 막을 수는 없으니
내가 빠르게 배워야 하는 게 맞긴 한데그냥 조금만 기다려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내 뒤에서 차례를 젊은이가 나를 조금만 기다려주고 내가 쩔쩔맬 때 약간의 다정함으로 사용법을 알려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