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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Mar 07. 2020

쉽게 씌어진 시의 시대

나는 꼰대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위의 연으로 시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를 생각한다. 


독립출판으로 출발하여 현재 몇억 대(어쩌면 수십억일지도)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한 작가의 메가히트작이 드라마화 된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두꺼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그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부턴가 각 대형책방 베스트셀러 자리에 '괜찮아' 시리즈가 들어앉더니 내려올 줄을 모른다. 한두 번 정도야 괜찮았다. 사람들이 정말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나 보다 했다. 그런데 이제 뭐 거진 '괜찮아'다. 그중에는 제목부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책도 있고, 책을 펼쳐 보면 이게 정말 책에 나올 문장인가 싶은데 어쨌든 결론은 '괜찮아'인 책도 있었다.


베스트셀러 코너는 시대를 반영한다. 한때 우리 사회의 주제는 '웰빙'이었고, 또 그 이후에는 각종 공부법, 독하게 살아남는 법들, 그리고 잠깐 인문학의 바람이 불기도 했다. 지금은 명실상부 '괜찮아'의 시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서 카드 형식으로 활자를 접하는 게 익숙해졌다. 긴 글을 보면 우선 스크롤부터 내리고 본다. 하단에 세 줄 요약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기사도 볼 필요가 없다. 제목만 보고 댓글창으로 이동. 본문에 무슨 가짜뉴스와 편파되고 왜곡된 정보를 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보 습득은 유튜브를 켜놓으면 된다. 동영상으로 다 설명해주는데 굳이 글을 왜 읽겠는가.


이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아니 글을 읽는다는 건 얼마나 큰 용기를 요하는 일인지.

다른 의미에서 요즘 나오는 책을 읽는다는 것도 엄청난 용기를 요한다. 내가 꼰대인가 싶기도 하다. 몇년 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의 끄트머리 쯤에 주인공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바로 저런 거구나 싶다."


평생 집사로 살아온 주인공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듯이 나도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홍상수의 한 영화에서 문소리는 또 이렇게 말한다. 

"시는 누구나 써요. 나도 써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다. 하지만 괜찮다, 회사를 가기 싫으면 그만두어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이런 말들의 나열을 시라고 볼 수 있을까.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들, 거기다 주술목이 맞지도 않는 비문들, 쉽게 선택된 단어들의 나열들은 글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어떤 가치를 가질까. 사람들이 눈으로 '괜찮다'는 말을 보는 것, 그것이 그 책의 목적이고 존재의 이유일까. 그렇다면, 그 글을 읽고 위로를 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그렇게 대충 씌어진 글로 위로될 정도로 사소한 것들이었나.


한편으로는 사회가 '괜찮다'는 말 한번 해주기 어려울 정도로 각박하고 날이 서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크고 작은 실수와 실패와 좌절에서 그 누구도 괜찮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쓰러져 있을 시간이 어디 있냐, 게으른 거다, 노력을 덜 했다, 말로 내뱉지 않아도 그런 생각들과 분위기가 도처에 깔려 있다.


그렇기에 그냥 아주 쉽게 씌어진 '괜찮다'는 글을 열렬히 환호할 수밖에 없을지도.


인용이 너무 많은 듯하지만 한번 더 인용을 하자면,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비트겐슈타인)이며,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다. 사용하는 언어만큼 생각할 수 있다. 사용이라 함은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모든 행위다. 잘 다듬어진 좋은 글을 읽고, 단어를 학습하고 문장을 구사하는 것은 단지 '글 좀 쓴다'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쉽게 씌어지기' 보다는 '성급하게 씌어진' 내 글들을 보며 항상 반성하곤 한다. 아직 내 세계의 한계는 너무도 좁다. 그래도 글로 손쉬운 위로를 하고 싶지는 않다. 불특정한 사랑, 부정확한 위로가 대관절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연찮게 내가 쓴 글에 접근한 여러분들 역시

여기까지 빠르게 스크롤을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위로를 찾아 오셨다면 내 글에는 위로가 없으니 스크롤을 잘 내리셨고, 정보를 찾아 오셨더라도 내 글에 정보가 없으니 잘 내리셨다. 그렇다면 뭐가 남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쉽게 위로를 건네는 사회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신중하고 정확한 위로를 주고 받았으면 좋겠다. 위로를 받는 사람이 주저앉아버리게 만드는, 하던 일을 쉽게 포기하게 만드는, 그저 '쉬어라'로 점철되는 위로 말고. 


나는 어딘가 꼬여도 단단히 꼬인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위로의 글들을 보면 내 서러움과 절박함을 이용해서 쉽게 돈을 버는구나 싶은 생각부터 든다. 당연히 그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밖에 없는 병든 우리 사회부터 탓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냥, 오래도록 좋은 글을 읽고 싶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잘 조탁된 단어들, 정확한 묘사가 주는 따뜻한 시선을 느끼고 싶다. 그런데 그런 글들은 돈이 안 될 테니까 자꾸만 출판 시장에서 밀려나겠지. 그러면 어느덧 책이라는 물건은 슬프고 힘들 때 부모도 친구도 해주지 않는 괜찮다는 말을 해주는 스피커가 될 테지. 


꼰대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냥 꼰대가 되겠다.


다시 윤동주로 돌아가 마무리한다.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라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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