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따라 빽빽하게 들어선 빌라와 아파트를 보면 숨이 막힌다. 봉천 1동부터 11동까지, 이제는 보라매동, 성현동, 은현동, 중앙동, 행운동, 청룡동, 청림동, 낙성대동, 인헌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아무튼 봉천동은 숨 막힌다.
남부순환로는 언제나 정체가 극심하고 남부순환로를 따라 이어진 상가가 번쩍거린다. 사람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남부순환로 주위로 산 너머 산, 고개 넘어 고개. 그리고 곱창집 너머 곱창집, 그 옆에는 대나무가 높이 솟은 보살집, 거기서 몇 걸음 더 가면 샤로수길의 핫플레이스.
봉천동에서 제법 오래 살았다.
중앙동에 한 번, 은천동에 한 번 살았는데, 동 이름은 달라도 걸어서 10분 정도, 거의 골목길 하나를 두고 갈리는 것 같다.
첫 번째 살았던 중앙동 집은, 전혀 봉천동에서 중앙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으나 중앙동이라는 이름 덕인지 지하철과 가까웠다. 그래서 고개를 넘어 다닐 필요가 없었다.
은천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거의 매일 봉천고개를 넘어 다녔다. 차도 못 들어갈 것 같은 좁은 골목길을 지나 아파트 단지를 넘어넘어 가면 휴, 겨우 봉천고개 꼭대기다. 그래도 봉천고개까지만 넘어가면 숭실대까지는 내리막길이라 수월하게 내려갈 수 있다.
봉천고개 넘어 가던 길
하지만 반대로 귀가를 생각하면, 또 끝도 없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급경사 내리막길을 걸어내려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버스가 없었던 바도 아니었는데, 버스를 기다리고 타고 하느니 그냥 걸어가는 게 나았다. 그땐 또 어리기까지 해서 제법 에너지가 남아돌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나는 회식이 있으면 10시가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 쉽게 보내주지 않을 때 늘상 했던 말이 이거다.
"제가 정남규가 불 지른 동네에 살거든요. 밤 되면 너무 무서워서 빨리 가야 돼요."
사실이었다. 중앙동은 희대의 미친놈이라는 정남규가 한 여성을 살해하고 불까지 지른 봉천10동이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어쨌든 봉천동이니까.
봉천동은 거기서 나고 자란 사람도 많지만 외지인도 엄청나게 많다. 지하철 타고 강남 가기 좋아서 직장인도 많고,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똑똑한 학생들도 많다. 외국인도 많고, 고시생도 많다.
부자부터 아주 가난한 사람까지, 가지각색의 인간군상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서울대까지 걸어서 3~40분은 가야 하는데도 서울대 '입구' 역이 있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서울대학교 가는 길에 모텔촌이 즐비하고 주중 주말 가릴 것 없이 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중년 남녀가 팔짱을 끼고 모텔에 들어가는 게 일상적이다.
골목길을 오르내리면서 나는 항상 생각했다.
여기에 오래 있지 말자. 떠나자. 여기 계속 살다 보면 나는 더 좁은 골목길로 내몰릴 것이다.
실제로 봉천동에서 내 생활은 엉망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안 좋은 영향을 끼친 인간 세 명을 여기서 만났고, 미래도 없고 답도 없는 일을 했고, 자주 아팠고, 자주 울었다.
그래도 봉천동에 관한 좋은 기억들을 떠올려 보자면
재래시장이 있다.
봉천중앙시장에 가면 온갖 채소와 해물 등을 싸게 살 수 있다. 500원치 부추 한 단 사서 무쳐먹고 전 구워 먹고 했다. 양은 보장하나 질은 모르겠다. 시장에서 소라를 사 와서 삶았는데, 상했다는 걸 알고 다시는 해물을 사먹지 않았다.
현대시장도 있고, 인헌시장, 신원시장 등등 봉천 몇 동이든 재래시장 하나쯤은 끼고 있다.
그리고 대망의 샤로수길이 있다.
샤로수길은 이미 유명하니까 더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샤로수길이라는 이름이 생기고 나서 내가 좋아했던 가게들이 없어졌다. 여태 남아있는 가게들도 있다. 좋은 이자카야와 노래방이 있고, 아직도 종종 생각나고 가고 싶다.
2015년에 다녀온 샤로수길 프랑스홍합집
봉천동은 집값도 저렴한 편이었고(이제는 아니다) 생활권이 좋긴 하다. 쇼핑, 맛집, 은행, 영화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포진되어 있다. 물론 질서가 하나도 없고, 가장 큰 쇼핑몰은 자주 망해서 이름도 자주 바뀐다.
서울 생활을 갓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봉천동이라는 지명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낙성대역에서 서울대입구역, 봉천역, 신림역, 신대방역까지 아우르는 봉천동. 셀 수 없이 많은 원룸이 촘촘하게 박혀있으니까. 저렴한 곳에 가보면 허름하기 말로 다 할 수 없고, 집 같은 집에 살아보고자 하면 이 가격에 봉천동을? 싶다.
그래도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면 가장 먼저 살펴보게 되는 동네 중 하나가 바로 봉천동이다.
외지인도, 가난뱅이도, 부자도, 똑똑한 학생도, 덜 똑똑한 학생도 다 받아줄 수 있는, 품이 넉넉한 동네. 봉천동은 그런 동네였다.
나는 봉천동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봉천동에서 무럭무럭 자라 봉천동을 떠났다.
집 앞에 있던 손바닥만한 꼬치구이집과 관악산과 현대시장과 자주 가던 노래방을 두고.
계속 봉천동에 눌러살 게 될 것 같았다.
매일 재미있었고 슬펐고 그래서 불안했다.
어렸던 탓도 있겠지만 지금 살아도 불안했을 거다.
지리멸렬한 가난 때문이 아니고, 그냥 그 동네가 주는 압박감. 신림동 고시촌이든, 쑥고개든, 봉천고개를 따라 자리잡은 아파트든 그 압박감 때문에 숨이 막혔다.
나는 그 시절에 왜 그리도 노래방을 가고 술을 마시고 난리를 쳐댔는가.
생각해보면 봉천동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시절의 내가 문제였고, 그 시절의 내가 선택한 동네가 봉천동이어서 봉천동이 숨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