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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Jul 30. 2020

술독에서 헤엄쳐 나올 용기

4주간의 우울증 분투기

 내 발로 상담소에 간 지도 4주. 

늘 그렇듯 내 인생에 드라마는 없으므로 드라마틱한 변화도 없다. 하지만 몇 가지를 시도했다. 우울러에게 뭔가를 시도한다는 건 더럽게 힘든 일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버거운데, 당장 전등 스위치 내리는 일도 너무 힘든데 또 뭔가를 해야 한다고!


그런 우울러에게 가장 쉬운 건 술마시고 뻗어버리는 거다. 4주간 매일 빠짐없이 술을 마셨다. 원래 소주 1병을 먹고 잠들었는데, 상담 받으러 갔으니까 뭔가 해야겠다 싶어서 소주를 와인으로 바꿨다. 


주종을 바꾸는 건 굉장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소주라는 게 그렇다. 가성비라는 말은 소주에나 어울린다. 편의점 기준 1,800원이면 취할 수 있다. 술꾼에게 안주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항목이므로, 바나나 두어 개면 충분하다. 그리고 적당한 취기, 숙면.


주종을 처음 바꾼 건 아니다. 쭈그려 앉아 소주나 마시고 있는 꼴이 보기 싫어서, 사실은 그 모습이 누군가를 닮아서, 보드카를 마신 적이 있다. 있어 보이니까.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으나, 어쨌든 자존감이 지하 50층까지 내려가서 나 스스로의 가치를 개똥만큼도 치지 않는 우울증 환자는 본인에게 돈을 투자하는 걸 무척이나 아까워한다. 남들한테는 돈 팍팍 써도 내가 15,000원짜리 앱솔루트 한 병 사서 마시는 꼴은 보기 싫은 거다. 


그러니 소주 같은 거, 가성비가 내리다 못해서 범람하기까지 하는 소주를 마시고 나라는 꼴사나운 존재를 잊고 잠든다.


그래도 일단 바꿔봤다. 남들도 와인은 다 한잔씩 마시니까, 나도 와인을 샀다. 그리고 한 병을 3회에 걸쳐 나눠 마셨다. 내가 없어질 정도로 취할 양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적응했다. 안주는 조그만 치즈 두 개. 뭐, 그래도 바나나, 방울토마토에 소주 마시는 것보다는 있어 보여서 만족했다.


그렇게 매일매일 술을 마시다 보니까 4주가 지났다. 그 사이에 일 하느라 바빴지만 나는 충실한 내담자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하라고 한 대로 병원도 다녀왔다. 상담 가기 하루 전날에 부랴부랴 갔다. 그러니까, 나의 이 충실이 나를 갉아먹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충실하다. 


논외로, 델핀 드 비강의 <충실한 마음>이라는 책이 참 좋았다.


병원에 가서 서면으로 작성하는 심리 검사를 했고, 이상한 기계를 손목 발목에 채워서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조화를 확인하는 검사도 했다. 확인하나마나 우울증과 불안, 알콜중독의 점수가 아주 높았고, 부교감신경은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경험상 우울증 약을 먹는 건 정말정말 싫었지만 약도 탔다. 선생님은 내 말을 듣고 있는지 안 듣는지 몰라도 말끝마다 응, 응, 하면서 추임새를 넣어주셨다. 안 들어도 상관없다. 나도 선생님 앞에서 무척이나 연극적이었다. 


저는 진짜 괜찮거든요. 진짜 잘 지내고, 일도 열심히 하고, 친구도 많구요, 가족들도 예전엔 문제가 많았지만 지금 단편적으로 보면 아주 화목해요. 다만 잠을 잘 자고 싶고, 죽고 싶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거 빼곤 다 괜찮아요.


나는 가련하고 비련한 주인공이 아니므로 씩씩하게 얘기했다. 무슨 약인지 설명을 안 하고 약을 주셨고, 그걸 먹고 잠들었다. 술 없이.


아침에 일어나니 술에 취한 상태가 그리웠다. 고향처럼 그리웠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술잔에 흠뻑 적셨다가 꺼내 흔들고 싶었다. 


정신과 약을 먹는다고 내가 좋아질까? 나에게는 그런 확신이 없다. 의지라는 말은 너무 과대평가되어 있는데, 의지라는 게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제반조건이 갖추어져야 의지가 생긴다. 


당장 숨 쉬고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또 의지를 가져야 한다니. 진짜 맨날 눈물이 줄줄 나는데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니. 노력하라니. 


그렇지만 충실한 우울러인 나는, 우울증에 좋다는 운동을 등록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고통스럽게 운동하고, 엉망진창인 내 몸을 체크한다. 내가 너무 못해서 웃음이 나온다.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아서 슬프다.


그럼에도 나는 드디어 어제 술 없이 잠들었고, 나아지겠다고 울면서 정신보건센터에 갔고, 살겠다고 운동도 등록했다. 고작 잠드는 일과 숨쉬는 일이 이다지도 고단하다. 


상담센터 선생님은 내가 용기를 내서 멋지다고 해주었고, 정신과 선생님은 불안함을 줄이고 교감신경에 균형이 맞추어지면 숨 안 쉬어지고 심장 뛰는, 그러니까 공황장애가, 그리고 불면증이 나아질 거라고 했다.


우리 시대의 우울러들이 작은 용기를 내어보기를 바라본다. 주종을 소주에서 맥주나 와인으로 바꾸는 정도... 본인에게 맛있는 밥을 한끼 먹여주는 관용... 그 나머지는 그냥, 조금 덜 울자.


 세상에 나 혼자 이렇게 거지같고, 내가 제일 쓰레기고, 뭐 그런 생각이 든다면, 혹시 이 글이 당신에게 닿는다면, 매일 밤 죽어야겠다고 울면서 술마시고 있는 나를 떠올려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도 어디에서 누군가가 같이 울고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덜 서글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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