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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Jun 16. 2020

세상에, 이렇게나 죽고 싶다니

나의 우울은 시시한 편이다. 격정적인 드라마가 없다. 


안타깝게도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우울은 절절한 한 편의 드라마처럼 묘사된다. 어떤 충격을 겪고, 마음에 커다란 구멍 같은 게 뚫려서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거다. 우울한 인물은 방에 틀어박혀서 나올 줄을 모르고, 매일 울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력하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매일 아침 작업실로 출근도 하고, 일이 들어오면 일을 하고(요즘엔 코로나로 일이 거의 없지만), 때 되면 퇴근하고, 잘 때 되면 자니 무척 건강한 인간이라 하겠다. 


건강한 내가 불현듯 내 마음 상태가 엉망이 되었음을 깨달았다(처음은 아니다). 이건 정말 불현듯이라 마치 영감처럼 왔다 사라진다. 뭔가를 깨닫고 나아져야지! 하고 다짐하지더라도 아마 조만간 다시 우울한 사람이 될 것이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도 죽지 않고 나를 잘 살려두기 위해서 일정 부분을 기록해둘 필요가 있겠다.


1. 술을 너무 자주 마시지는 않는지.

월화수목금토일을 빼놓지 않고 술을 마셨다. 안주도 없고, 즐거움도 없이. 처음에는 소주만 마셨는데 이제는 온갖 걸 다 먹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사랑하면 중독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알콜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술을 사랑해버리자, 하는 생각. 말도 안 되지만.


2. 밥을 거의 안 먹고 있지는 않는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는 이야기의 책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나는 그런 부류의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읽어본 적은 없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라도 먹고 싶다면 다행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아서 매끼를 굶거나 대충 때우는 중. 그래도 몸이 굴러가는 건 참 신기하다. 나에게 비축 에너지가 이만큼이나 있다는 것도.


3. 하는 일에 집중이 되는지.

머리가 멍해진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뭘 해야겠다는 마음도 없다. 그런 마음 상태로 갑자기 컴퓨터 앞에 앉은 것도 용하다. 사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시기라는 거다. 이 시기를 기록하지 않으면 또 손바닥에 쥔 모래알처럼약간의 흔적만 남기고 사라질 테니까.


4. 자꾸만 졸리지는 않는지.

머리에도 on/off 장치가 있어서 자꾸 힘들어지면 스스로 꺼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잠이 쏟아진단다. 잘 모르겠다. 우울해서 졸리는 건지, 집중이 안 되어서 졸리는 건지, 밥을 안 먹어서인지,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어젯밤에 와인을 마시면서 영화를 봤다. 별로 슬픈 내용은 아닌데 그냥 보다가 울기 시작해서 계속 울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의 영화였다. 


뚝뚝 흐르는 눈물을 두루마리 휴지로 톡톡 찍어내다 무릎을 모아 안고 막 울었다. 난 가끔 그런 내 행동이 너무 웃기다. 마치 시시한 내 우울에 드라마적 요소를 추가한 듯 작위적이라서. 그때 한 시간 정도 내 머릿속을 사로잡은 생각은 '죽고 싶다, 혹은 죽어야겠다'였다.


이렇게까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니! 

죽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또렷해서 조금 놀랐다.

가상의 인물처럼 '이야, 그렇게나 죽고 싶어 하다니!' 하며 나를 관찰하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었다.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상담을 여러 번 받았으니까 우울의 근원은 알겠고,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와야 한단 말인가. 도무지 빠져나올 구멍을 찾지 못해서 술만 퍼 마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술의 가장 좋은 친구는 우울이다. 서로 끝없이 상호관계를 유지한다. 우울해서 술 마시고, 술 마셔서 우울하고. 영영 반복.


나도 드라마 같은 데서 보여주는 격정적인 우울증이었다면, 싶지만 난 그저 그렇다. 그럴 용기도 없고 의지도 없다. 다만 기록해둘 뿐이다. 난 이렇게 바보고, 무기력한 상태지만 또 괜찮아지는 날이 올 거고, 괜찮다가도 또 이렇게 될 테니. 그때 가서 내가 왜 이러지, 갑자기 왜 이럴까, 하지 않도록.


몸을 굴리면 정신이 맑아질 거란 걸 아니까 나가서 뛰고 싶은데 그럴 의욕도 없고. 

뭘 먹어서 기분이 좋아지면 좋을 텐데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상담과 치료와 명상과 각종 마음 챙김을 하며 살아왔더니 이제 뭘 해야 하는 줄은 아는데 힘이 없다.


이게 뭐람.


그래도 대한민국의 우울한 사람들이여, 

좋은 음식을 챙겨 먹고, 푹 자도록 하자. 나가서 좀 걸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방에서 요가라도 하자. 요가가 어려우면 명상하자. 명상도 어렵다면 숨이라도 잘 쉬자.


다들 힘이 없을 테니 힘 내지 말자. 

어차피 시작되었을 우울의 여정, 이왕이면 바람 부는 방향으로, 몸에 힘 풀고 가볍게 떠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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