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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Apr 23. 2021

[넷플릭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스포가 있습니다.


*


나는 군산이 좋다. 군산을 생각하면 이성당이 떠오르고, 짬뽕이 떠오르고, 추웠던 그해 겨울이 떠오른다. 나는 기차를 타고 전국을 여행하고 있었다. 혼자 여행하는 건 처음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크리스마스를 즈음해서 기차표를 끊었다. 계획이랄 것도 없고 목적지도 없는 여행이었다. 무척이나 촌스러웠던 나는 가방 자체로도 아주 무거운 토트백에 코트를 입고, 니트를 가방에 박박 욱여넣은 채로 여행길에 나섰다.

가방에 든 것들을 하나하나 버리고 싶었지만 그때 나는 보따리장수 스타일로 짐을 가지고 다녔었다. 어쩌다가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눈을 떠 보니 군산에 있었다.

내가 아는 군산은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본이 쌀을 수탈하는 항구였다는 것뿐이었다. 군산역에 내리자 눈이 내렸다. 내 어그부츠 끝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밤이었고,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딜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지만 은파유원지를 거쳐 어느 찜질방으로 들어갔다. 어딘지 모르게 으스스한 곳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 유명하다는 이성당에 줄을 서서 단팥빵을 하나 먹었다. 나는 그런 텍스쳐는 처음 느껴봤다. 빵을 먹으니 기분이 좋아서 동네를 조금 돌았다. 그 유명한 히로쓰가옥과 초원사진관을 봤다.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 간밤에 내렸던 눈은 그치고 초원사진관 방향으로 해가 들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초원사진관은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정원이 혼자 운영하는 곳이다. 정원의 삶은 단순하고 성실하다. 사진을 찍고, 인화하고, 밥 먹고 설거지하고. 정원은 시한부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병원에서 치료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남은 생을 조용히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친구 부모님 장례식에 다녀온 그에게 나타난 다림. 다림은 빨리 해달라고 재차 재촉한다. 다림은 주차단속요원으로, 불법주차 사진을 찍고 인화하는 게 일이다. 정원은 다림에게 친절치 못하게 대하지만 미안하다며 아이스크림을 사준다. 사랑의 시작이 그 시점인지, "아저씨는 왜 나만 보면 웃어요?"라고 다림이 질문했을 때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다림이 초원사진관에 수도없이 들락날락하면서 자연스럽게 둘은 가까워진다.


다림은 불쑥 찾아오기도 하고, 며칠간 안 나타나기도 한다. 단조로웠던 정원의 삶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같이 걷거나 같이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다림이 친구가 표를 줬다고(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하여 같이 놀이동산도 간다.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밤길을 걷는, 평범한 연인의 모습 같다.


꼭 그렇다. 조금만 더 같이 있지, 하는 순간에 정원의 병세가 악화된다. 정원이 아픈 줄도 모르는 다림은 매일 사진관을 찾아가지만 정원을 만나지 못한다. 다림은 속상한 마음에 편지를 써서 문 아래로 넣는다. 그랬다가 곧장 돌을 집어던져 유리창을 깨뜨린다. 정원이 퇴원했을 때는 다림이 다른 곳으로 발령받은 후다. 정원은 다림의 편지를 읽는다. 하지만 답장을 쓸 수가 없다. 여느 때처럼 사진을 찍고, 인화하고, 밥 먹고, 설거지하며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정갈한 옷을 입고 앉아, 지금껏 수많은 이들에게 시켰던 그 표정으로 혼자 증명사진을 찍는다. 도대체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나는 차마 헤아릴 수도 없다. 내 손으로 내 영정사진을 준비하는 마음을 나는 모른다.


초원사진관은 다시 아버지가 운영하게 되었다. 다림은 초원사진관을 찾아와, 언젠가 정원이 찍어주었던 사진이 걸려있는 걸 본다. 환하게 웃고 있던 그때의 그 모습이다.


*


정원은 참 무덤덤하다. 감정 변화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처음부터 허허실실하는 좋은 사람 같다. 영화는 극히 일부만을 보여줄 뿐이다. 아마도 처음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는 죽니사니 하며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고 울었다가 웃었다가 했을 듯하다. 태권도 도장 하는 친구와 술 마셨을 때의 장면을 보면 계속 한잔만 더, 한잔만 더 하다가 애먼 사람과 시비까지 붙는다.

우리는 감정의 파도를 다 거친 후에 정제된 정원의 감정들을 볼 뿐이다. 그래서 이 남자에게 찾아온 짧은 사랑이 안타깝다. 정원의 마지막 내레이션에서처럼 정원은 추억으로 바뀌지 않은, 사랑 그 자체만 간직한 채 떠난다. 다림이 가지고 갈 추억은 무수한 사진들처럼 언젠가 그치고야 말 것이다.


그해 겨울, 경암동 철길마을을 따라 쭉 걸어보다가 다시 이성당에 가서 빵을 하나 사고 기차를 탔다. 아무것도 몰라서 어떤 풍경도 붙잡지 못했다. 그러고서 군산에 두 번 더 갔다. 찜질방에서 안 자고 새만금에 있는 호텔에서 잤다. 그래도 단팥빵은 먹었고, 초원사진관에도 갔다. 그때는 내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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