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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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 오고 친구들은 모두 어딘가로 술을 마시러 떠난 밤이었다. 나는 오늘만큼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영화를 봤다. 이런 날은 질질 끌면서 늘어지는 영화를 봐야지, 하고 오랜만에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골랐다. 참을성 부족한 나에게 적당한 1시간 30분의 러닝타임과 사막을 배경으로 무의미하게 벌어지는 칼싸움들. 영화 중간에 어디론가 전화 한 통을 걸었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다가 끊었다.
구양봉은 사막에서 객잔을 꾸리며 점을 봐주며(라고 하지만 사실 청부살인 중개업자다) 혼자 살아간다. 구양봉에는 매년 경칩 때마다 찾아오는 친구가 있는데, 황약사다. 황약사는 여인에게 얻어왔다며 '취생몽사'라는 술을 건넨다. 구양봉은 먹지 않고, 황약사만 먹고 취한다.
그런 구양봉에게 모용언이 찾아와 누굴 좀 죽여달라고 한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대상은 황약사. 자기 동생과 결혼하기로 해놓고 다른 여자에게 갔다는 이유다. 그런데 모용언의 동생이라는 모용연이 또 찾아온다. 누굴 좀 죽여달라고 하며, 돈은 두 배로 쳐주겠단다. 대상은 오빠인 모용언. 모용언은 황약사와의 사랑을 가로막고 있고, 자기를 사랑해서 평생 옆에 두려고 한다고.
뭐 알고 보니 한 명의 사람이 상처를 받고 두 개의 자아로 분리된 모양이다. 모용연이자 모용언은 객잔에서 자고 일어나 구양봉의 몸을 만진다. 구양봉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자신을 만지고 있다는 걸 안다. 자신도 그 손길에서 다른 사람을 떠올린다. 사랑했던 형수다. 이게 웬 신화의 <너의 결혼식> 같은 상황인지 싶다. 그날 이후로 모용언/모용연은 객잔을 떠나 무술을 연마한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연마했다고 한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물이 갈라진다. 그는 '독고구패'라는 전설의 검객이 된다.
그가 떠나고 또 한 여인이 찾아온다. 태위부에 동생을 잃고, 복수를 의뢰하러 왔지만 너무 가난해서 가진 거라고는 계란 한 바구니와 당나귀밖에 없다. 구양봉은 돈이 없으면 몸이라도 팔라며 매몰차게 거절한다. 여인은 그럼 객잔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그리고 진짜 하염없이 기다린다. 삯바느질이라도 하러 가지, 싶은데 양가위 감독 속의 인물들은 늘 그렇다. 그냥 놓여있다.
또 객잔을 찾아온(장사가 꽤 잘 된다) 검객. 그는 눈이 멀어가고 있다. 검객은 황약사를 만나면 죽이겠다고 다짐한다. 아내와 정을 통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황약사는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검객이 구양봉의 객잔 앞에 서 있던 여인에게 별안간에 입을 맞추는 바람에 여인의 계란이 다 깨졌다.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무책임함을 보인다. 구양봉의 중개로 마적떼를 죽이기로 하지만 해가 저물기 시작하며 눈이 보이지 않아 죽음을 당한다.
(마적떼가 찾아왔을 때 칼끝에 불을 붙이고 술을 뿜어 불을 지르는 양조위는 정말 멋있다.)
다음으로 찾아온 자는 홍칠이다. 점궤에 구양봉이 '7' 때문에 죽는다고 하여, 홍칠이라는 자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맨발로 다니면서도 뛰어난 검술을 자랑하는 홍칠에게 구양봉은 밥을 주고 마적떼와 싸우는 일을 맡긴다. 돈도 준다. 구양봉의 내레이션 중, 돈을 받을 때 세어보지 않는 자는 돈을 쉽게 써버리고, 세어보는 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홍칠은 마적떼와 싸우는 일이 자기와 맞지 않는 일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남은 계란을 들고 있던 여인을 돕는다. 대가는 계란 1알. 그 대가로 손가락 하나를 잃는다. 그는 사막까지 쫓아온 아내와 함께 길을 떠난다.
구양봉의 형수 자애인은 원래 구양봉의 연인이었다. 하지만 홀로 강호를 누비며 다니는 구양봉 대신 그의 형과 결혼했다. 말수가 적은 아들 하나를 두고 항상 누군가를 생각한다. 옆에 있던 남자가 구양봉을 생각하냐고 묻는다. 그 남자는 황약사다. 황약사는 자애인을 사랑했지만 자애인의 마음이 구양봉에게만 가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매년 구양봉을 찾아갔던 거다. 소식을 전해주면 자애인을 계속 만날 수 있으니. 자애인은 황약사에게 '취생몽사'라는 술을 전해준다.
무엇이든 잊을 수 있다는 술 '취생몽사'를 마셔봐도 기억은 점점 선명해진다. 구양봉은 청부살인 중개를 하며 살아간다. 다시 경칩이 되고, 황약사는 오지 않았다. 6년간 떠돌다, '동사'라는 이름의 검객이 된다. 모든 걸 깨달은 구양봉 역시 객잔을 불태우고 고향으로 돌아가 '서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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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영화이지만 사랑에 상처받은 자들로 가득하다. 구양봉은 사랑의 고통에서 도망쳐 사막에 자신을 은폐했다. 하지만 홍칠은 구양봉과 달리 아내와 함께 강호를 누비기로 했다.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든, 왕가위 영화는 시간과 기억,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더불어 장국영은 정말 아름답다.
영화는 "움직이는 건 바람도, 나뭇가지도 아닌 네 마음이다."라는 불경구절로 시작한다. 술을 마시고 싶은 건 비 때문도, 친구들이 다 술을 마시러 떠나서도 아니고 그냥 내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