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장애물 뛰기와 미어캣

말줄임표의 미학

by 명지바람

문을 여니 난이 있었다. 곧게 뻗친 난에서 나는 짙은 향을 잠시 맡고 있으니, 살짝 어지럼증이 났다. 소파를 찾아 앉았다. 10년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한 쪽 구석에 걸려 있는 서예와 불상. 산처럼 쌓여 있는 연구 논문이 아니었다면 불당에 있을 법한 생김새였다. 감상에 빠져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짙은 향에 취해 이대로 눕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편히 쉬지 못했다. 어쨌거나 부탁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급한 전화였는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도 전화를 놓지 않았다. 일어서서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교수님은 손을 저며 앉으라는 눈치를 줬다. 10년 만에 만났어도 교수님은 정정한 모습이었다. 과거로 돌아가 예전 추억을 공유하며, 교수님 역시 예전 모습과 변한 게 없다는 말을 던지고, 적절한 리액션을 추가하고 나니 시간은 금방 지나가 있었다. 부탁한 건은 들어주겠다고 했다. 드린 선물이 맘에 들어서인지, 아니면 제자의 옛 정 때문인지는 모르나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교수님이 부탁을 들어준 것이 더 중요했다.


그 뒤로도 교수님과 여러 번 소통을 하며 일을 마무리 지었다. 교수님은 항상 끝에 물결표와 말줄임표를 남발했다.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잠깐 메시지를 주고받을 일이었기에, 그리고 교수님 평소 습관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남겼다. 그러나 생각보다 일 진척이 더디었다. 교수님의 지인과 소통을 이어갔지만 말이 통하지 않자 교수님과 소통할 일이 더 많아졌다. 무언가 비난하거나, 말을 숨길 때마다 한껏 늘어진 말줄임표가 화면을 가득 메웠다. 나중에는 그 말줄임표만 봐도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공작새가 화려한 모습으로 본인을 치장하는 것처럼, 말줄임표로 교수님 당신을 치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후로 말줄임표는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굳이 말줄임표를 써야 할 순간이 아닌데 말줄임표를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는 절대로 말줄임표를 쓰지 않을 거라며, 저 교수님처럼 대화하진 않을 거라며 다짐한 것도 어느새 5년이 지났다. 일도 어느 정도 손에 익고, 팀원들과 신나게 얘기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익숙해진 시간이었다. 어느 날 갓 입사한 팀원이 내게 물었다. “왜 XX님은 말줄임표를 많이 쓰세요?” 문득, 내 말투에 말줄임표가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느 순간 말줄임표 남발하는 교수님이 되어 있었다.


화끈거리며 요즘 메신저에서 이야기할 때 이모티콘을 쓰려고 하거나, 아예 말줄임표 자체를 의식하고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 의식하지 않고 글을 쓰면 말줄임표를 쓰고 있었다. 대체 왜? 절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교수님의 뒤를 왜 따라가는 것인가?


해외에서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가 있었는지, 왜 나이든 이들이 말줄임표를 남발하는지에 대해 쓴 책이 있었다. 그레천 맥컬러의 ‘인터넷 때문에’라는 책에는 말줄임표를 쓰지 않고서는 대화를 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일화를 잘 정리해 놓았다. 그들은 말줄임표가 맥락을 구분하는 기호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말줄임표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기호라는 것이다. 문장 간 구별로는 부족하고, 말줄임표를 통해 의미를 더 확실하게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온점으로 문장을 구분 짓기에는 말하지 못하는 맥락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말줄임표를 쓴다고 답했다. 화면 너머로 건너지 못한 뉘앙스를 표현하기 위해 말줄임표를 쓴다고 말이다. 맞다. 말줄임표는 그 말하지 못하는 뉘앙스를 전달하기에 적절하다. 어차피 모든 문장은 뒤에 그림자처럼 뉘앙스와 맥락을 포함하기 마련이다. 온점으로 딱 끊기에는 문장은 너무나도 짧고, 아쉽고, 표현에 있어 부족하다.


나이 든 이들이 말줄임표를 남발하는 것은 이런 뉘앙스와 호흡을 담아내기 위한 목적이다. 그리고 그건 모든 문장에서 해당된다. “아침밥 먹고 가야지…”와 “아침밥 먹고 가야지”는 느낌이 다르다. “이건 꼭 해야 해요…”와 “이건 꼭 해야 해요.”는 다른 감각을 준다. 그리고 그 감각에 있어 예민한 이들은 참아내야 하는 그 순간에도 불구하고 말줄임표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금처럼 이모티콘과 GIF가 활발하게 사용되는 이 시기에, 말줄임표 없이도 많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이다. 실제로 젊은 세대들은 말줄임표를 사용할 필요 없이 다양한 감정을 ‘짤’로 표현한다. 아예 말없이 짤로만 대화하는 일도 빈번하다. 풍부한 감정을 온전히 다 담아낼 수 있기에 말줄임표는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일 뿐이다. 그냥 이모티콘을 쓰세요, 아저씨!


그러나 이런 젊은 세대들도 나이가 들면 말줄임표를 쓴다는 것이 참으로 재밌는 부분이다. 다양한 이모티콘, 이모지, GIF를 사용하던 이들도 어느 순간에는 말줄임표를 쓴다. 학습되는 건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일찍이 말줄임표를 좋아하지 않는 세대가 이모티콘이나 GIF를 나이가 들어서도 사용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어릴 적 습관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줄임표는 문장 곳곳에서 나타난다. 아이 깜짝이야! 또 말줄임표를 쓸 뻔했네.


사실 말줄임표는 인생의 모든 일이 깔끔하게 끝맺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사용하는 표지다. 젊은 시절, 모든 것이 A아니면 B라는 일도양단의 가치관 속에서 확실한 것을 찾아 헤맨다. 그렇기에 온점만 있어도 젊은 세대의 문장은 항상 숨가쁠 수밖에 없고, 다른 문장기호를 붙일 이유가 없다. 점은 점으로 이어지고, 그 점은 다른 점으로 이어가야 하는 장애물 뛰기처럼 말이다. 에너지와 패기, 그리고 젊음의 순간은 확실한 뜀뛰기의 호흡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젊음은 사그라든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때론 흑백의 영역 너머, 회색지대에 있는 것들이 온통 내 주변에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당연히 모든 일에 말줄임표가 붙을 수밖에 없다. 정말 그러한가? 혹은 정말로 이게 맞는가? 항상 의심과 회의를 품에 안고 살 수밖에 없다. 온점을 찍어야 하는 그 순간에도 점 2개를 더 붙이고 싶은 욕망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그런 불안감과 회의를 생각하는 이들은, 말줄임표를 들숨과 날숨처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느린 발걸음으로, 연신 주변을 살피는 미어캣처럼 말이다.


어쩌면 교수님이 말줄임표를 끊임없이 남발했던 건, 제자의 모습 속에서 불안함을 계속 발견했기에 보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나쁜 습관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불안함을 드러낸 표지일 수도 있다는 뜻. 카톡을 켜서 무의식적으로 교수님과의 대화창을 켜봤다. 검색이 되지 않았다. 아니 이게 또 왜 말썽이야. 나는 한숨을 쉬면서 열심히 스크롤을 내렸다. 상단에 메시지가 떴다. “우산 오늘 가지고 나갔니? 비 온다고 하더라…” 어머니의 문자였다. 빠르게 답변을 남기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가, 나도 모르게 점 세 개를 덧붙였다. 오늘도 나는 또 말줄임표를 남겼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유방암과 인체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