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는가?
표백된 방은 생경했다. 얕은 숨을 몰아쉬는 동료를 내려다보며 나는 착잡했다. 4기 암. 이미 골수까지 퍼진 암은 손쓸 수 없이 온 몸으로 퍼진 상태였다. 모르핀을 맞으며 아픔을 견디고 있지만, 그가 멀쩡히 일어나 걸어 다니며 내게 웃음을 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픔이 가라앉은 덕분에 동료는 편안히 잠에 들 수 있었다. 옆에서 퀭하게 그를 바라보는 동료의 부인은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부인의 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보며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나는 병실을 빠져나왔다.
같이 일했던 그가 갑작스럽게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 받은 건, 일터를 떠나고 3년이 지나서였다. 나는 그 일을 그만두었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있었고, 그 친구는 밤을 새 가며 한창 일을 하던 때였다. 한창 일할 나이에 생긴 암은 그의 웃음을 앗아갔다. 손쓸 새도 없이 그의 병세는 악화되었다. 이미 그를 만났을 때는 타이밍이 한참 지난 때였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밤낮이 없었고, 몸을 갈아가며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픈 걸 알아도 티를 내서는 안 되는 일. 그렇기에 병세가 더 악화 되었으리라,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알기에 나는 차마 그 친구를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를 화장했던 때는 7월 말이었다. 유난히도 더운 여름에 모든 이들이 입을 열고 짜증내던 시기였다. 푸르른 여름은 생명력을 진하게 내뿜고 있었다. 생의 절정과 마지막. 그 절묘한 교차에 씁쓸해 하며 나는 일상 속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나는 기사를 통해 그가 앓고 있던 암을 개선할 수 있는 해결책이 등장했다는 헤드라인을 보게 되었다. 실험적인 방법이었지만 효과를 본 이들이 많았다.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완치 확률이 있는 혁신적인 치료. 그 기사를 보면서 나는 조금만 그 친구가 버텼더라면, 목숨을 더 연장할 수 있었을까? 그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죽음과 생의 기로에 놓인 이들이 많다. 제도권에 있는 치료법으로는 한계가 있는 환자들은 단 하나의 완치 가능성을 위해 목숨을 건 도박을 한다. 설사 그게 안전하지 않다고 해도, 환자들에게 완치라는 단어는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한 유혹이자, 모든 것이다. 제도권 의료 시스템은, 환자들의 욕심을 알면서도 이를 경계한다. 검증된 방법, 자칫 잘못하면 최악으로 치닫지 않는 방향으로 연구를 한다. 획기적인 치료법이 될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이 한없이 낮다면 그 치료법은 시장에서 적용될 수 없다.
과학자이자 환자였던 비타 할라시는 이러한 한계에 의구심을 던졌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대학 연구원인 그녀는 우연히 자신의 몸 속에 퍼진 암세포를 발견했다. 두 번 째였다. 이미 한 번 유방암이 발병했기에 그녀는 과감하게 유방 제거 수술을 받아 목숨을 구했다. 다시는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녀의 기대와 무관하게 유방암은 그녀를 다시 위협했다. 잘라낼 유방도 없었기에, 그녀가 기대할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연구하던 OVT 실험.
OVT는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았다. 임상실험을 거치지 않아 확실한 효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연구를 믿었고,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도박을 했다. 자신의 몸에 OVT 실험을 한 것이다. 도박은 성공했다. 유방암 세포가 사멸한 것이었다. 동료 연구원은 그녀의 몸을 모니터링하면서 OVT 임상 실험에 실용적인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실험 후 4년이 흘렀고, 그녀는 다시 유방암이 발병하지 않았다.
실험 데이터와 그녀 자신의 경험을 발판으로 그녀는 유방암 관련 논문을 저널에 게재하려 했다. 유방암의 위험에 빠진 여성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권위 있는 저널들은 그녀의 논문제출을 거절했다. 그녀가 스스로 OVT 임상실험을 한 것이 문제였다. 윤리연구위원회(IRB)의 사전 허락을 거치지 않은 인체실험 연구결과는, 설사 과학자 스스로 그 당사자라고 해도, 저널에 게재될 수 없다. 12개 저널에 투고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고, 그 연구는 빛을 보지 못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많은 유방암 환자들이 이 대체 치료의 정보를 얻기 위해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얼마나 급한 이들이 많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들 유방암 환자들은 OVT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검증되지 않고, 믿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물론 타당하다. 할라시가 지나치게 운이 좋은 케이스였기에 운 좋게 유방암을 치료한 것일 수도 있기에, 과학계의 보수적인 접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유방암 환자들은? 어떤 치료도 받을 수 없는 그들에게는 대안 치료가 유일한 희망이다. 설사 그 가운데 많은 수가 목숨을 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단 하나의 실낱 같은 가능성을 붙잡고 생을 유지하려는 이들이 많다. 그런 이들에게는 할라시의 연구 결과는 소중한 연구 결과일 수도 있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설사 그게 위험성을 동반한 일일지라도, 그 결과를 논문을 통해 공개하는 것을 막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 치료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치료는 시행되어야 한다. 그 접근 기회, 실험의 가능성조차 박탈당하는 것은 유방암 환자들에게 잔인한 일일 것이다.
코로나 때를 생각해보자. 보수적으로 접근하던 제약회사와 연구자들이 ‘놀라운 기회’ 덕분에 임상실험을 축소하거나 ‘비약적인 결론’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전세계가 겪은 위협이라는 차원에서, 보수적인 연구 윤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예외적인 경우에는 예외적인 실험이 감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프’ 덕분에 백신 치료제가 3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초기 예측을 뒤엎고, 1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에 개발될 수 있었다. 만약 원칙과 ‘윤리 코드’를 지켜가면서 개발했다면 이룰 수 없는 성과일 것이다.
혹자는 코로나라는 상황과 유방암이라는 사례를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물론 팬데믹으로 지정된 병과 유방암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에게는 최소한의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단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싶은 이들에게 논문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 동료가 떠난 지 벌써 7년이 되었다. 현장에서 그와 같이 뛰던 때가 문득 생각난다. 항상 웃음 짓는 친구였다. 맨날 불평과 한숨을 쉬던 나를 위로하던 그 친구는 이제 세상에 없다. 그 생각을 안 하려고 하지만 문득문득 생의 가장자리를 뚫고 엄습하는 부재의 공포에 나는 소름 돋는다. 곧 있으면 그 친구의 기일이 다가온다. 큰 꽃을 준비해야지. 나는 그렇게 읊조리며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그 친구가 옆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여름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