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안전해."

사라져 가는 안전지대를 그리워하며.

by 잰니
'이런 영화, 다시는 안 봐야지.'

영화 버드 박스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다짐했다. 일분일초도 긴장을 풀 수 없을 만큼 몰입도 높은 영화였지만, 러닝타임 내내 팽팽해진 마음 상태가 띵 하고 풀려 감당되지 않았다. 대체 뭘 위해 본 거지? 따뜻한 감동이나 교훈, 어떤 메시지도 없는 영화를!

해당 영화를 비난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고, 그저 내 정신건강을 위해 좀비물과 아포칼립스물을 멀리 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2018년. 채식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된 식당이 있다. 홍대 산울림소극장 1층에 위치한 수카라. 비건 식당은 아니지만, 내가 두 번째로 가 본 채식 식당이었고, 가장 마음에 든 곳이었다.

처음은 이랬다. 나와 함께 식사를 하겠다고 한 끼 채식을 자처하는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막 더워지기 시작한 계절. 그 친구들과 수카라에 가보기로 했다. 홍대입구역에서부터 걸어갔기 때문에 꽤 땀이 났는데, 지도에서 암만 근처라고 알려줘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어떻게 열어야 할지 모를 거대한 초록문이 있을 뿐이었다.


'입구이긴 한가?'


친구들과 까치발을 들어 내부를 보려 애썼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식당이 아니라 소극장 사무실이거나 로비면 어떡하지? 근심하던 와중 대문 구석에 SUKARA라고 써진 글귀를 보았다. 여기였다! 우리는 자신 있게 우리 몸 셋을 합친 크기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펼쳐진 풍경은 아포칼립스를 떠올리게 했다. 아니, 식당이 아포칼립스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닫고 들어온 저 문 밖 세상이 아포칼립스 같았다. 높낮이가 다른 의자들, 테이블마다 놓인 유리병, 가지런한 주방기구들과 단정한 매무새로 진지하게 요리하는 스태프분들. 언뜻 봐도 개성적인, 다양한 인종의 손님들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맛난 음식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안전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게 수카라는 그런 공간이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지, 계속 더 다녀야 할지 고민될 때, 믿고 따르던 선배와 방문한 적도 있었다. 다른 분들에게는 솔직하게 터놓을 수 없었지만 그에겐 말할 수 있었다. 이 회사엔 비전이 없는 것 같다고. 사양산업이라는 그늘에 나 자신 또한 사양되는 것 같은 그 묘한 그늘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편하긴 한데, 편하기 싫다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그는 내 의견에 동의하며 내 젊음을 응원했다. 덕분에 예정된 것보다 더 빨리 회사를 떠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선배와 공간 덕이었다.




코로나로 공간이 축소되면서 안 그래도 부족했던 안전지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생계의 공간, 생존의 공간, 문화의 공간, 휴식의 공간, 집중의 공간. 한정된 공간과 그 공간을 함께 할 파트너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 요즘이다.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약 한 달의 시간 동안 단 두 번. 집을 벗어났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적은 처음인지도 몰랐다. 마치 이 원룸이 마지막으로 남은 안전지대 같았고, 대문 밖은 아포칼립스 세계 같다고 여겨졌다. 물도 있고, 식재료도 있었는데, 은근히 체질에 맞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는데, 어쩐지 함께 하고 싶다고 느꼈다. "이제는 안전해." 그렇게 말해 줄 사람과.





수카라, 안녕. 많이 그리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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