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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잰니 Dec 25. 2021

행복한 크리스마스이브

행복은 뜨끈한 욕조에 담긴 물처럼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이브였다. 이른 아침부터 PCR 검사를 받기 위해 눈곱도 떼지 않고 잠옷 차림에 그대로 패딩만 입고 버스에 올랐다. 1시간 남짓 대기한 끝에 검사를 완료했다. 담당 선생님은 얼마나 많은 이들을 검사했을까. 아주 빠르고 신속하게 끝났다. 며칠 전 이비인후과에 다녀와서인지 그다지 아프지도 않았다. 다음에 또 올 일이 있으면 이곳에 와야겠다, 다짐하면서 출근했다.


일은 당연하게도 하기 싫었다. 크리스마스이브와 금요일의 시너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금요일만 되어도 일하기 싫은데, 크리스마스이브라니! 모니터 화면만 보고 앉아 있기엔 엉덩이가 자꾸 들썩였다. 그래도 어찌어찌 정해진 퇴근시간보다 30분을 더 일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원래 회사에 출근했다면 퇴근해서 집에 오는 시간만큼 침대에 누워서 쉬었다. 늦기 전에 나가야겠다, 다짐하고 다시 패딩에 모자를 쓰고 나섰다.


연인과 나눠 마실 뱅쇼를 직접 만들기 위해 편의점에서 와인을 사야 했다. 집 근처 가장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하는데, 앞서 걷는 남자분도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그의 뒤를 밟는 것처럼, 편의점에 들어서서도 같은 진열대 앞을 지났다. 어쩐지 머쓱해져 괜히 다른 것을 보는 척했는데, 그는 슬쩍 둘러보다 곧 계산대로 가 캐셔 분에게 말을 붙였다.


"여기, 와인은 없나요?"

그거,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나도 보이지 않아서 '여긴 없나' 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캐셔 분이 위치를 알려주셔서 나도 쓱 시선을 보냈다. 다섯 병 정도. 많지 않은 수량이었지만 그는 와인을 꼼꼼히 보았고, 나는 다2소에 가야 했기 때문에, 일단 거기부터 다녀올 속셈으로 편의점을 벗어났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와인을 사 가려는 남자. 집엔 배우자가 기다리고 있었을까? 야근하고 돌아가면서 그래도 기분이라도 내자고 와인을 사 가지고 들어가는 걸까? 아니면 혼자라도 이브 분위기를 내기 위해 한 병 사는 것? 무엇이 됐든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 길로 보이는 모든 식당 안의 사람들이 특히 행복해 보였던 건 기분 탓일까. 다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기분이다, 외식이다! 하고 찾은 거겠지. 그 마음들이 너무 귀엽고 애틋했다. 인류애로 가득 찬 느낌. 그러면서 문득, 아, 행복하다. 이런 게 행복한 거구나. 찰나의 행복감이 천천히 스치고 지나갔다. 별다를 것 없는 순간인데. 누가 들으면 그게 무슨 행복한 일이냐 할 테지만.




다2소에서 필요한 물건, 그러니까 뱅쇼를 담을 1.5L 물병과 과일과 통후추, 바닐라빈 등을 걸러낼 체망을 샀다. 그곳엔 크리스마스 장식, 크리스마스 기념 인형, 잔, 스티커 등이 즐비했다. UNDERNEATH MY CHRISTMAS TREE라는 부분만 흥얼거릴 수 있는 캐럴도 흘러나오고. 크리스마스는 다2소에 있었다!


처음 갔던 편의점으로 돌아갔다. 앞서 들렀던 남자분은 어떤 와인을 사 가셨을까. 나는 라면에 넣어먹을 체다치즈 하나를 고르고, 쪼그리고 앉아 와인을 구경했다. 마침 예전에 친구로부터 집들이 선물로 받은 적 있는 와인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그 와인 한 병과 아주 약식으로 만들어진 와인 병따개를 샀다. 


내가 딸 수 있을까? 혼자 와인을 따는 건 처음이었다. 집들이 선물로 받았다는 와인도, 초봄에 받아놓고 한여름에 친구들 모임에 들고 가서 겨우 마셨으니까. 와인을 마실 땐 항상 곁에 가족, 친구, 아니면 애인이 있었다. 도구가 있긴 했지만 못내 걱정됐다. 


"나는 어엿한 성인 여성이야! 와인 하나쯤은 딸 수 있지!"


나 들으라고 외치며, 처음엔 테이블에 앉아 코르크에 오프너를 박아 넣었다. 후, 쉽지 않지만 그래도 큰 문제없이 다 넣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어? 이게 아닌데? 언뜻 힘을 줘 빼내는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 이게 아닌가? 반대 방향으로 다시 돌려야 되는 건가? 아니, 그러니까 코르크 밖으로 쇠가 빼꼼 얼굴을 드러냈다. 아니, 아니야. 이게 아니야. 2KG짜리 아령을 들어 올린다는 마음으로 힘을 줘보고, 순간의 반동을 이용해서 힘을 줘보기도 했지만 아주 조금 고개를 내밀어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야, 할 수 있어. 포기 안 해. 서러운 마음은 쥐뿔도 들지 않았다. 나는 이 뱅쇼를 꼭 만들어야만 해.


그러다 마침내 뻥! 소리를 내며 와인이 열렸다. 기괴한 자세 때문에 와인은 샴페인처럼 터지고 말았다. 바닥에 질질 흘린 건 물론이고, 손과 다리에도 보라색이 덕지덕지 묻었다. 동시에 웃음도 터져 나왔다. 깔깔깔. 내가 해냈어! 내가 혼자 와인을 깠다고! 흘린 와인을 물티슈로 훔쳐내다 바닥이 아니라 벽, 부엌 문틀에도 피가 튄 것처럼 와인이 적나라하게 튀어있었다. 그걸 봐도 웃음만 나왔다. 아, 정말 재미있는 크리스마스이브야.




1시간 정도. 이러다 꺼져서 가스만 새는 거 아니겠지, 싶을 정도로 약한 불에 뱅쇼를 나지막이 끓였다. 방 곳곳에 은은한 와인과 과일향이 퍼져 기분이 달큼해졌다. 어쩌면 날아가버린 알코올이 공기에 태워졌을까. 약간 취한 듯도 했다. 라면에 체다치즈를 3장이나 얹어 먹고서 디즈니 드라마 '호크아이' 마지막 편을 봤다. 


나는 요즘 눈물을 참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슬픈 기분이 들면 그냥 '뿌엥!'하고 아이처럼 울어버린다. 그 편이 훨씬 편하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운다고 해서 약한 게 아닌데. 오히려 울 때 잘 우는 게 강하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우는 건 창피한 것도, 감수성 넘친다고 으스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때 나 자신에 충실하는 것뿐이다.


드라마에서 등장인물 옐레나가 모두를 위해 자신을 가차 없이 희생해버린 언니 나타샤를 그리워하면서 뱉는 모든 대사 하나하나가 '뿌엥!'이었다. 나도 언니 사랑해서 저 맘 알아. 어떻게 참아! 절대 못 참지! 울 거 다 울고 코를 팽 풀었다. 혼자 울고 웃고 다 한 셈. 마지막에 찾아온 감정은 평안이었다. 


행복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행복한 일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사실 문득문득, 자칫하면 굉장히 서러웠을 수도 있었을 일이라 생각했다. 혼자 영하의 날씨에 패딩을 껴입고 어두운 편의점에 와인을 사러 가서 늦은 시간까지 일하느라 퀭해진 표정으로 편의점에 들러 와인을 사는 남자를 만난 일. 집에 돌아와 와인 좀 까려고 하는데 그게 안 까져서 용쓰다가 결국 꽤 많은 용량을 바닥에 쏟아 크림색 매트 끄트머리가 보라색으로 물들어버린 일. 그거야말로 '뿌엥!' 울어버릴 일이지. 서러웠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뭐랄까. 행복의 렌즈를 끼고 있달까. 내일 뱅쇼를 나눠 먹을 연인과의 일과가 기대되기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이 즐겁고 행복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이브에 혼자 있든 아니든. 그런 건 하나도 상관이 없이. 그냥 내일이 무척 즐거울 테니까.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상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들던 그때 그 시절처럼. 내일 선물처럼 맞이할 하루를 기다리는 일은 뭐가 됐든 행복한 일이었겠지.




행복이란 건 웃음처럼 그렇다고 생각하면 실제로 그렇게 돼, 하는 개념이 아니라, 파파라치처럼 어떤 순간을 빠르게 포착해내야 오롯이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뜨근한 물이 차야 몸을 담글 수 있는 욕조 같은 것 아닐까. 정도껏 차지 않으면 아무리 몸을 웅크리고 있어도 시리도록 춥기만 한, 나의 작은 욕조. 물이 어느 정도 차야 몸도 담그고, 푸른빛, 금빛, 핑크빛 입욕제도 풀고, 틀어놓은 음악에 맞춰 콧노래도 부르게 되니까.


샤워 부스밖에 없어서 모든 게 씻겨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욕조가 있지만 너무 커서 남들만큼의 물로는 채워지지 않는 사람, 욕조가 작은데도 쉽게 물이 차지 않는 사람 모두 얼른 뜨근한 행복을 누렸으면. 메리 크리스마스. 




p.s. 우연히 흘러 들어와 나의 작은 욕조를 채워준 당신에게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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