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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잰니 May 10. 2022

옆자리를 지킨다는 것.

잠시 앉아있다 올게요.

가수 엄정화는 MBC 합창단원 출신이다. 티비엔 예능 '서울체크인' 4화에서 그는 말한다. 합창단원 시절, 주로 MBC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는데, 간혹 가수 김완선을 마주치곤 했다고. 그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와 식사는 하지 않고, 가만 앉아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이 조금은 외로워 보였다고 말하면서, 옆에 앉아있어주고 싶었노라고. 그 모습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말했다. 막상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덤덤해 보였다.


그 대화에서 열일곱의 내가 떠올랐다. 열일곱의 나는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을까? 지금에 와선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그 시절을 더듬어보는 것만으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무엇이. 그때의 나는 무엇이 그렇게 힘들어서. 상하지 않게 하려고 꼭꼭 밀봉해 냉장고 깊숙이 던져놓은 버터 조각처럼, 나는 그때의 기억 일부를 숨겨놓은지도 모르겠다.


10분의 짧은 쉬는 시간이었는지 중식이나 석식을 먹고 난 후의 시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자리는 듬성듬성 비어 있었고, 내 짝도 어디론가 가버려 혼자 앉아 있었다. 몇은 TV를 보고, 몇은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는 엎드려 있었다. 잠을 청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친구와 싸웠다거나 속상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 일상의 우울이었다.    


분명 혼자였는데, 기척이 느껴졌다. 짝은 아니었다. 누군가 다가와 옆자리에 가만 앉아 TV를 보며 간간이 웃었다. 그렇게 계속 앉아 있었다. 눈물 콧물을 어떻게 처치하고 일어났는지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누가 내 옆에 앉았는지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우리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친구였다. 이제 막 친해지던 중이었던. 엉덩이에 로우킥을 날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곤 했던. 조금은 이상한 녀석.   


"울었어?" "아니." 뭐 이런 대화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두루마리 휴지가 놓여 있었던 것도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본인 자리보다 가까운 곳에서 TV를 보고 싶었는가 보다 생각했을 법한데, 그렇지 않으니까. 나는 그것이 친구의 위로법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지도, 달래주지도 않고. 그저 울음을 끝낼 때까지 옆에 가만히 앉아있어 주는 것. 덕분에 내게 그 순간은 혼자 숨죽여 운 게 아니라, 조용히 위로받은 순간으로 남았다. 지금까지 그 감각을 잊지 못한다.


그는 내 옆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지키다.' 왜 하필 '지키는' 것인지, 무엇으로부터 지키는 것인지 생각해봤다. 글을 멈추고 가만 멈춰보아도 잘 모르겠다. 눈을 감고 양팔을 좌우로 뻗어보았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처럼 외롭다. 초여름인데도 맨살에 와닿는 공허함이 서늘하다. 이거구나. 평소엔 느낄 수 없는 이 시린 감각을 느끼지 않도록. 이 공간을 머리칼, 내뱉는 숨, 오돌토돌한 피부, 잔잔한 웃음소리로 채워주는 것. 인간이라면 면치 못할 본능적인 외로움과 고독감에 너무 오래 자신을 빼앗기지 말라고. 자신의 존재를 잠시 내어줌으로써 지켜주는 것이구나.


가만 눈을 감고 그런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팔을 몇 번이나 뻗어도 아무것도 닿지 않을 만큼 외로웠던 순간들. 꼭 물리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감정적으로 텅 빈 세계에 혼자 남겨진 듯했던 순간들. 그때의 나를 한 명씩 떠올려보고, 작은 의자를 하나 그려 넣어주자. 그리고 얼마간 앉아있다 오자. 상상이 어렵다면, 작년에 개봉했던 거미 히어로의 멀티버스 세계관을 떠올려도 좋다.  


아무리 꽁꽁 싸매도 오래 꺼내지 않으면 제 아무리 잘 만든 버터도 상하고 만다. 그럼 냉장고 전체를 썩게 하겠지. 이쯤 쓰자니, 시간여행에서 잠깐 짬이 난다면, 그의 옆에도 의자를 하나 그려 넣어 앉아있다 오고 싶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지키고 싶은 자리가 있다. 그렇지만 주인이 밀어냈으니. 하는 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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