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겪은 '똑부'를 소개합니다.
5년 차 직장인. 이제 겨우 주니어 티를 벗을까 말까 한 연차로 나름 '멍게(멍청하고 게으른)'부터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까지 섭렵했다. 멍게, 멍부야 말하자면 입만 아프고 득 될 것도 하등 없으므로 유니콘처럼 희귀한 존재인 '똑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에 앞서, 동일 인물이라도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고, 또 시기에 따라 지금은 '똑부'라 생각하더라도, 연차가 더 쌓인 이후에는 다른 평가를 하게 될 수 있으리란 것을 미리 밝혀둔다.
최연소 이사. 내가 경험한 똑부의 타이틀이었다. 보통은 '어떻게 저 직급이 됐지?' 의문을 자아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똑부님은 그 '어떻게'를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그 똑똑함을 으스대는 사람이 많고, 혼자만 알고 숨기는 사람도 있다. 한데 이 똑부님은 자신의 스마트함을 이용해 통찰을 얻고, 그를 무조건적으로 지시하기보다는 데이터로서 설득해 보였다. 물론 모든 일이 데이터로 설명되진 않지만, 최소한 그런 노력이라도 한다는 점이 다른 상사들과의 차이다.
똑부는 마법을 부릴 줄 안다. 무려 매너리즘을 물리치는 마법이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다 통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그 마법이 유독 잘 통하는 사람인데, 놀랍게도 그 마법은 회의 중간중간에 나타난다. 통상 직장생활에서 회의란 짧게 끝날수록 좋은, 어쩌면 회식보다 악명 높은 활동이 아니던가? 그런데 똑부와의 회의는 무슨 마법 가루라도 뿌린 것처럼 갑자기 일할 의욕이 솟아나고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구나!' 자부심마저 생겨난다. 이게 마법이 아니면 뭐냐고!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 하면, 그는 그 어떤 직원들보다 성실하다. 매일 지표를 챙겨보고 내외부에서 정보를 얻는다. 팀 내 누구보다 엑셀을 잘 다루고, 데이터를 잘 본다. 성격이 급해서 바로 해결을 봐야 한다. 그러려면 비효율적인 건 참을 수 없다. 거추장스러운 것들? 다 걷어내야 직성이 풀린다. 위아래는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실무자'다. 모든 실무자를 각 업무의 팀장으로 대한다. 직접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신뢰하지만, 근거 없이 모면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믿지 않는다. 맡은 사업을 종합적이고 장기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그에 대해 팀원들에게 공유한다.
부담스럽지만 동시에 책임감도 생긴다. 그를 보다 보면, 나도 저 사람처럼 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게 까딱 잘못하면 '똑부한테 인정받고 싶다!'로 빠져서 구렁텅이행 특급열차가 될 수도 있지만(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너무 괴로워진다..) 분명 '저렇겐 안 돼야지.' 보다는 얻을 수 있는 점이 많을 터. '아, 내가 너무 기계적으로 혹은 근시안적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스스로 일하는 자세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상사는 많지 않다.
사실, 똑부를 인간적으로 좋아하진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감정적 유보 상태다. Respect.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공적으로만 평가할 수 있을까? 그것도 능력이지 싶다. 똑부는 상사로서 챙길 부분만 챙긴다. 괜히 더 친한 척하거나 인간적인 척하지 않고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렇다고 마냥 서먹하고 지루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팀 분위기를 움켜쥐고 밝게도 운영했다 적당히 긴장감 넘치게 끌고 가기도 한다. 어쨌든 높은 직급의 상사이기에 다른 동료들이 알아서 맞춰주는 것도 있겠지만.
"저 연봉받으면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어." 많이 들어본 말이고, 나 또한 많이 해본 말이다. 한데, 똑부 앞에선 쏙 들어가는 말. 얼마나 받으시는지 모르지만 대단하십니다.. 물론 그도 사람이기에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회사를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장점이 명확하기에. 결국은 직원들을 더 효율적으로 써먹고, 더 일하게 만드는 존재일지 모르지만, 인간은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아를 버릴 수 없을 것이기에. 그 열정과 꾸준함에서 배울 점은 분명히 있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