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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피늄 Sep 27. 2020

등교 일기

지나온 시간들이 새삼스레 느껴지는









2020년 5월 26일 화요일.





깊고 조용한 밤. 잠든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거실로 나왔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최대한 작게 줄이고, 내일 학교에 갖고 갈 준비물들을 마저 확인했다. 모든 물건에 이름을 표시하라는 담임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스티커에 이름을 써넣고 알록달록한 색연필, 사인펜, 크레파스의 끄트머리에 붙였다.


이름을 쓰고 붙이고 쓰고 붙이고. 각각의 낱개마다 써 붙였으니 이름을 오십 번 이상 쓴 것 같다. 내가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천천히 반복적으로 써 본 적이 있었나. 이름을 써 내려갈수록 시간은 거꾸로 흘러갔다.


네 살 여름. 자기 몸집만 한 파란색 가방을 메고서 울 듯 말 듯 한 얼굴로 놀이학교에 등원했던 첫날.

‘해님반’ 이름표를 목에 걸고 유치원 잔디밭을 신나게 뛰어다녔던 여섯 살의 봄. 그리고 어느새 여덟 살이 된 아이는 내일 첫 등교를 앞두고 있다.

    

이름 스티커를 모두 써 붙였다. 같은 자리에 나란히 정렬되어있는 아이의 이름은, 시간을 따라 걸어오다 이곳에 도착한 발자국 같았다.


빠트린 건 없는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책가방 안의 준비물들을 확인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2020년 5월 27일 수요일.





학교 중앙현관 앞에서 급하게 찍은 몇 장의 사진으로 아이의 첫 등교를 기록했다. 찍고 보니 얼굴의 반을 가려버린 하얀 마스크만 눈에 들어온다.


선생님은 체온계와 손소독제를 들고서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서글펐다. 일상이 되어버린 방역과 환영의 입학식도 없이 새로운 출발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마음이 울적해졌다.


걱정과 긴장과 초조함이 뒤섞인 어수선한 감정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없는 조용한 아침이 오랜만이어서 굉장히 낯설었다. 나른해진 몸은 소파에 찰싹 붙어 있는데, 머릿속엔 1학년 2반 교실 어딘가에 앉아 있을 아이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교실 어느 쪽에 앉아 있을까.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배고프진 않을까. 화장실 가는 게 무섭진 않을까. 계속 이런저런 걱정에 빠져서 아침을 보냈다.


하교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아이의 모습이 반갑고 사랑스러웠다. 품에 꼭 안고 얼굴을 마주했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아이의 눈망울. 왜 눈물이 고인 걸까. 학교에 있는 동안 어떤 기분이었을까. 많은 것들이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지금은 아이가 먼저 스스로 꺼내는 말을 귀담아듣고 싶었다.


교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지, 선생님은 무서운지 친절한지 궁금했었는데 오늘 그걸 전부 알게 되어서 가슴이 뻥 뚫렸다며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밥도 맛있었고, 옆자리 친구에게 먼저 인사도 했고 화장실도 그 친구랑 같이 갔다 왔다고. 쉬지 않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행이다. 그리고 씩씩하게 학교 잘 다녀와줘서 고마웠다.








2020년 6월 8일 월요일.





어? 기린 어제 여기 있었는데? 코끼리 코가 더 올라간 거 같아!


학교 잔디밭 곳곳에 세워져 있는 동물 모양의 동상들이 밤 12시가 되면 움직인다는 무시무시한 학교 괴담을 듣고 난 후, 등교할 때마다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동상들을 살핀다. 엉뚱하고 순수한 모습이 귀여워 나도 맞장구친다. 진짜 그러네. 사자도 뭔가 달라진 거 같지 않아?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밤 12시에 깨어나 학교 곳곳을 뛰어다니는 동물들도 아이의 상상 속에서 오래오래 그림으로 남아있었으면 한다.


수업이 끝나면 모래밭의 정글짐으로 달려간다. 한 칸 한 칸 내딛는 재미에 빠져있는 아이를 지켜보다가 살짝 지루해져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캠프 파이어, 텐트 안에서 흔들거리는 손전등 불빛, 무서운 이야기, 안개가 자욱한 새벽의 풀냄새. 운동장 곳곳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오래된 추억들이 어렴풋이 피어났다.


아마 5, 6학년쯤이었을 거다. 학교에서 이곳으로 야영을 왔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운동장이 왜일까 했는데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그때의 내가 생각났다.


운동장에 서 있는 나는 반쯤 텅 비어있고 나머지 반은 열두 살로 되돌아갔다. 열두 살의 나는 이제 갓 초등학생이 된 아이를 바라본다. 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만남. 왠지 묘하고 서글프다. 지나온 시간들은 새삼스레 느껴진다.




이제 집에 가자.


텅 빈 의식의 사이로 다시 우리의 일상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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