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어느 날의 이야기
마음이 공허하고 우울할 때 책 <굿 라이프>를 만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행복의 본질에 대해 깨달았고, 읽는 내내 행복은 물질적 풍요로움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에 따라 움직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을 幸福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만 이해하게 되면 일상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복(福)을 우연히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상을 벗어나서 아주 특별하고 신비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행복이 좋은 기분과 만족, 그 정도라면 그걸 가능케 하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알게 된다.
예컨대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내 삶에 만족을 더해주는 것이라면
아이의 웃음소리, 여름밤의 치맥, 시원한 산들바람, 멋진 문장들, 상사의 예상 밖의 유머, 잘 마른 빨래 냄새, 이적의 <걱정 말아요 그대>, 보너스, 모처럼의 낮잠, 여행, 무라카미 하루키, 미세먼지 없는 청명한 날씨 등등 그 리스트에 끝이 없다. 이것들은 다 우리 일상에 있는 것들이다. 행복은 철저하게 일상적이다.
<최인철, 굿 라이프 중에서>
긴 시간 무기력과 우울감에 빠져 있던 내가 동네의 작은 꽃집에서 잊고 살았던 ‘진짜’ 행복을 깨달은 적이 있다.
4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하원 후 아이를 미술 학원에 데려다줘야 했고, 피로와 스트레스에 찌든 나는 학원이 끝나자마자 얼른 집으로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오후 세시. 유치원에 도착했다.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니 뾰족뾰족 가시 돋친 마음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재빨리 신발을 갈아 신고, 내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이 꽃 예뻐! 갖고 싶어!”
나를 데리고 온 곳은 유치원 마당의 작은 연못이었다. 그 연못가에는 아기동백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빨간 장미를 닮은 동백꽃이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아이는 바깥놀이시간에 이 동백꽃을 발견했고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였다.
“와! 정말 예쁘네. 그런데 고울아, 예쁘다고 꽃을 꺾어버리면 나무가 아파하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 출발해야 돼. 학원 늦지 않으려면.”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아이의 표정이 뾰로통하다.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어떻게 기분을 풀어주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집 근처 새로 생긴 꽃집이 문득 떠올랐다.
“엄마가 지나가다가 꽃집 새로 생긴 거 봤는데 끝나고 거기 갈까? 거기서 갖고 싶은 꽃 직접 골라봐. 어때?”
아이는 씨익 웃으며 장미꽃이 갖고 싶다고 말했다.
학원이 끝나고 꽃집에 도착했다.
얼른 장미 하나 사고 집에 빨리 가고픈 약간의 귀찮음과 피곤이 섞인 기분으로 가게 문을 열었는데, 순간 눈앞에 펼쳐진 싱그러운 초록의 상쾌함에 나는 갑자기 설레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피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난 식물을 좋아했었지. 왜 그걸 잊고 살았을까.’
아이와 나는 보물 찾기를 하듯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예쁜 꽃과 식물들을 구경했다. 원래는 장미를 사려고 했지만 아이는 조그마한 꽃모종을 더 맘에 들어했고, 고민 끝에 자줏빛의 후쿠시아와 칼랑코에를 하나씩 샀다. 작고 귀여운 꽃망울이 달려있는 모습이 참 예뻤다.
꽃집 주인은 마치 장난감을 산 것처럼 방방 뛰며 신나 하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꽃 한 다발을 선물로 주셨다.
“아이가 꽃을 좋아하는 게 정말 예쁘네요. 이거 델피늄인데 이모가 선물로 줄게.”
여리여리한 분홍의 델피늄과 모종을 안고 꽃집을 나서는 아이의 얼굴엔 웃음이 한가득 피었다. 꽃과 함께 웃고 있는 아이를 보니 피곤에 찌들었던 나의 무기력함도 눈 녹듯 사라졌다.
오랜만에 꽃병을 꺼내 반짝반짝 깨끗이 닦아 신선한 물을 담고 델피늄을 꽂았다. 집 어느 공간에 두어도 그곳이 환하게 빛났다. 꽃은 그렇게 존재감을 뽐내며 집 안을 싱그럽게 빛내주었다.
조용한 새벽.
나는 혼자 거실로 나와 가만히 델피늄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분홍빛의 청순한 이 꽃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사진도 찍어보고 두 눈에 가득 담았다. 그러다가 문득 꽃말이 궁금해져 찾아보았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꽃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겐 무책임한 말임이 분명하다. 그저 묵묵히 감내하며 살다 보면 시간이 상처를 무뎌지게 해 줄 거라고 믿었지만, 그건 나만의 막연한 바람이었다. 그 아득한 시간을 혼자 걷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둡고 쓸쓸한 그늘 안이었다. 슬프고 외로웠다.
그렇게 서서히 그늘에 잠식되어 살아가던 내게 델피늄은 잊고 살았던 일상의 행복을 일깨워주었다.
식물을 보면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고, 화분에 물을 줄 때 코끝을 스치는 상쾌한 흙내음을 좋아하던 내 모습. 정말 오랜만에 행복한 나를 마주했다.
잠든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는 생각했다.
델피늄 같은 내 아이.
일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여주는 소중한 내 딸.
오늘 네 덕분에 엄마가 잊고 살았던 걸 깨달았어.
이렇게 너는 내게 항상 감동을 주는구나.
내게 와줘서 고맙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