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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Dec 06. 2020

백수와 고시생의 차이

무조건 도서관에 몸뚱이를 묶는다.

 

  완벽하게 백수다. 봄방학 기간 동안 미리 신규교사에게 인수인계와 모든 수업자료까지 싹 다 주고 남은 연가를 몰아서 쓰며 출근을 하지 않았었지만 어제 까지 나는 소속된 곳이 있는 직업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근로계약일이 어제로 완벽하게 끝난 무직 백수 아줌마다. 주부라고 하기엔 집안일에 공을 들이지 않으므로 패스해야 할 것 같고 , 그렇다고 고시생이라 하기엔 너무 늙어서 부끄럽다. 그냥 백수 아줌마가 딱 맞는 표현 같다. 굳이 그만두면서 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일과 임용고시를 계속 병행한다면 또다시 똑같은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교감선생님과 함께 보건실로 들어온 신규교사의 얼굴을 마주했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와 같은 고사실에 있던 수험생이었단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녀와 함께 임용고시 2차 면접을 기다리며 나 혼자 그녀를 깔보고 무시했던 방종이 떠올라 그녀와의 재회는 충격적이었다. 

면접시험장에서 나는 그녀를 쯧쯧 동정했다. 평범한 얼굴이지만 약간은 날카로워 보이는 그녀를 보며 원래 저렇게 생겨난 애들은 참 안됐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는 얼마나 이쁘다고.. 글로 써놓고 보니 더 부끄럽다.) 


‘이 미친년! 네가 뭐라고 겉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해? 저 여자가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 어떤 커리어를 가졌는지, 어떤 인성을 가졌는지 인물 하나로 다 평가할 수 있어? 꼴좋다. 병신아! 결과를 보라고! 네가 불쌍하게 생각했던 저 여자는 붙었고, 너는 떨어졌어. 축하합니다. 일 년 더 뺑이 치셔야 되겠습니다.’


나를 혼내는 나의 또 다른 인격이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갈기며 비수 같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겨우 1차 커트라인에서 3점 높게 턱걸이로 합격한 내 주제는 망각한 채 나보다 조금  인상이 안 좋아 보이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한껏 깔보며 무시를 하고 있었던 나의 모습이 그렇게 오만하고 가짢을 수가 없다. 못나고 인상도 안 좋아 보이는 그녀인데 (객관적으로 그렇단 건 아니고 그때의 오만한 내 생각에 나보다 못 나보였단 얘기니 오해 말자) 그녀가 붙었고 내가 떨어졌다. 심지어 내 후임자로 오며 내 자리를 밀고 앉게 되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물론 그녀 자의로 내 자리를 밀어버린 것은 아니다. 내가 사직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신규교사로 발령이 났으며 이제 나는 전임자가 되어 그녀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학교를 떠나면 되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양새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그렇게 단순하게 상황 정리가 되지 않는다. 


겸손한 척, 친절한 척, 공평한 척 하지만 알고 보면 잘난 척 쩔고, 절대 어느 선 이상으로 상대방이 가까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빈과 부, 갑과 을을 항상 계산하는 그런 속물 중에 속물 인 내 모습을 깨우치려는 신의 극약처방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수인계를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도망치듯 퇴근해 술을 마셨다. 운명 같은 그녀와의 재회의 의미를 되새겨보며, 나 자신의 오만함에 대한 자책과, 백수가 된 내 신세에 대한 한탄과, 고시에 올인하게 되었을 때의 압박감이 한꺼번에 훅 밀려 들어온다. 일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1차라도 붙은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는 거라며, 절대적인 시간 싸움에서 진 거지, 인간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위로해보았지만, 이제 정말 일 핑계 댈 것도 없고, 중학생이 된 아들 육아 핑계를 댈 것도 없이 오롯이 시험 결과를 내 할 탓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압박감에 다시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기간제로 돌아간다면 다시 그년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더 슬프게 만든다. 내 운명은 이제 철저히 나의 손에 달려있다.  자책은 우울을 부르고 우울은 포기를 부른다. 포기와 나는 너무나 가깝고도 절친한 친구이기에 이제는 절교를 해야 한다. 




인수인계를 마친 다음날부터 바로 도서관에 다녔다. 

집에 있으면 나는 백수이고, 도서관에 있으면 고시생이다.

 백수가 되며 딱하나 세운 철칙이 있다면 ‘도서관에 내 몸뚱이를 묶는다.’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도서관에서 가서 어두워질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숨이 막혀왔지만 내가 저질러놓은 일이니 내가 끝을 내야 한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는 곳만이 아니라는 것을 도서관 죽순이 생활 동안 알게 되었다. 내 삶의 폭과 깊이가 한없이 좁고 얕다는 사실도 도서관 죽순이 시절에 깨우친 반성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가방을 메고 도서관에 가면 똑같은 총각, 아저씨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온다.

 다들 어떤 삶의 궤적들을 갖고 있을까? 대학생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절반, 50대 이상은 많이, 30, 40대도 꽤 많다.  삶의 무게가 많아 보이는 쪽이 더 많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와서 가방을  툭 던져놓고 하루 종일 와이파이 프리존에서 핸드폰만 하다가는 청년도 있다. 간혹 나 같은 아줌마들도 있지만 아이들 케어를 하고 오는지 도서관 오픈 시간에 오는 땡순이 들 보다는 늦은 아침 시간에 와서 삼삼오오 모여서 공인중개사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 도서관을 다닐 때는 공부보다는 사람 구경하느라 시간을 더 보낸 것 같다. 그중 기억나는 도서관 고참이 있는 데  있는데 매일 노란색 마트 장바구니 카트를 밀고 오는 노란 카트녀다. 화장기 없는 이쁘장한 얼굴에 큰 키, 마른 체구의 그녀는 옷을 잘 차려입고, 화장을 조금 한다면 나름 눈에 띌 만한 외모를 지녔지만 늘 자다가 방금 일어난 차림새 그대로 나온 듯 한 모습이다.


  도서관 오픈 시간에 맞춰서 나와 비슷한 시간에 도착한 그녀는 바쁜 걸음으로 노란색 마트 장바구니 카트를 끌고 곧장 문헌정보실로 가서는 책들을 죽 담는다. 책을 읽고 고르는 것 같기도 하고 겉표지만 보고 고르는 것 같기도 하다. 마트에서 장을 보듯 양껏 담은 그 책들을 끌고 도서관을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어떤 때는 계속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어떤 때는 화장실에서 엉엉 울기도 한다. 심난한 울음소리에 덜컥 겁이 나서 사서에게 얘기하니 별스럽지 않게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며 카트녀에게로 향하는 사서. 둘이 어떤 얘기를 한참 나누더니 웃는 얼굴로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카트를 끌고 도서관 구석구석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그녀를 보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과 안면이 있는 듯 했다. 청소 여사님들과도 친하고 사서들, 경비아저씨, 식당 아주머니까지 두루두루 얘기를 하고 다니는 그녀는 도서관이 제2의 집 또는 직장 같아 보였다. 매일 같이 와서 카트를 끌고 다니며 말을 거는 그녀가 귀찮을 법도 한데 도서관 사람 어느 하나 그녀를 귀찮아하는 기색이 없다. 그냥 와서 인사하면 받아주고 얘기하면 들어주고, 가끔 간식거리가 있으면 나눠 먹는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걸 보건실 근무 동안 많이 느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공공도서관의 개념을 그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돈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 어느 곳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나 같은 백수 아줌마도, 집에 있는 것이 눈치 보이는 실직 아저씨도, 마음이 병들어 가족과 한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사람들도 두 발만 있으면 와서 편히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 도서관은 그냥 단순히 책 보는 곳이 아니었다. 이제 갓 신입으로 들어온 백수 아줌마 땡순이가 도서관 구력이 족히 몇 년은 되어 보이는 선임 중에 선임인 카트녀를 보며 인생의 폭을 한 뼘 키워본다. 


도서관은 나 같은 신참 백수 에게는 ‘백수 아니고 고시생’이라는 위안을, 카트녀 같은 선임에게는 ‘마음이 힘든 사람이 아니고 도서관에 친구가 많은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위안을 주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 나는 도서관에 있으면 백수 아줌마가 아니라 고시생인 거야. 우울해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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