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 Dec 29. 2023

너 벌써 졸업이야?

샘의 사명감을 깨워줘서 내가 더 고마워

보건교사로 먹고산 지 벌써 14년이 지났다.

처음 '교사'라는 신분으로 일을 시작할 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생님이 되리라'는 그 사명감은

'14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잘 버티고 있던가.






'똑똑' 보건실문이 수줍게 열린다.

민지(가명)다. 

'아이고.. 민지네.  내일이 졸업식인데 또 왔어. 쟤도 참 힘들어서 어떡하니..'

3년 내내 보건실 문이 닳도록 드나들던 민지가 내일이 졸업식인데 또 왔다.

오늘은 또 어디가 아파서 왔을까?


" 어 민지야. 어디 아파서 왔어?"

"아니... 아픈 게 아니라"

민지는 수줍게 뒤춤에 숨겨두었던 장미 한 송이와, 편지를 건네준다. 

"내일이 졸업식이라 선생님께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저 진짜로 선생님 너무 고마워요."






민지는 말이 없고 내성적인 아이다.

매번 두통과 복통을 자주 호소했고, 가끔 가슴이 두근거린다고도 했다.

내성적인 아이라 본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나는 민지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

보건실 환자의 절반이상은 마음이 아픈 경우가 훨씬 많은데, 민지도 마음이 아파 보였다. 

교내 상담을 받고 있지만 우울한 표정은 늘 한결같았다. 

민지가 오면 사실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보낼 수는 없으니 증상에 맞춰 약을 주거나, 쉬고 싶어 하면 잠깐 쉬게 해 주거나, 울면 따뜻한 물을 주고 잠시 다독여준 게 전부였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평소엔 표정이 거의 없는 민지가 그날은 울면서 숨을 꺽꺽 대면서 왔었다.

일단 침대에 눕히고, 휴지를 주고 따뜻한 물을 마시게 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몇 분 후 울음소리가 멈췄다. 많은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속상함을 풀기 원하기 때문에, 다른 환자가 없거나, 많이 바쁘지 않을 땐 옆에 앉아서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얼굴이 금방 좋아져서 가는데, 민지는 그날도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담임과 전화통화를 한 뒤 조퇴하겠다고 쌩하니 나갔다. 담임교사도 특별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기에 서로가 바빠 세세하게 묻지 않았다. 

며칠 후 학교폭력전담기구 회의에 들어가 알게 된 사실은 민지가 내성적이고 융통성이 없다는 이유로 같은 반 남학생으로부터 학교폭력을 당했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날 보건실에서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것이다.

민지는 그 후로 방학식까지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민지에게 학교폭력을 행사한 남학생에게 징계가 내려졌고, 민지도 방학 동안 많이 회복이 되어 

3학년부터는 학교에 잘 나오기 시작했고, 보건실 오는 횟수도 많이 줄었다.





나는 민지에게 해준 게 별로 없는데, 민지의 마음속엔 내가 고마운 선생님이라니... 괜히 머쓱하기도 하고

고맙게 바라봐준 민지에게 내가 오히려 더 고맙기도 하다. 




아침엔 또 승현(가명)이가 다녀갔다.

승현이는 민지와는 다르게 본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서 약간 피곤할 정도였다.

"공허해요" 

어디가 아파서 왔냐는 질문에 승현이는 "공허하게 느껴져요"라는 대답을 했다.


'나도 공허하다. 이놈아. 여긴 몸을 보는 곳이지 너의 공허함을 채우는 곳이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텅 빈 눈으로 공허하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차마 해줄 것이 없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배우가 되고 싶은데 부모님이 허락을 안 하신다는 이야기

여자 친구와 헤어진 이야기

공부를 하고 있는데 성적이 안 오른 다는 이야기

친구들과 잘 놀고 있는 와중에도 무언가 공허하게 느껴진다는 이야기.. 등등

1학년 때부터 승현이는 자기 이야기를 참 많이도 했었다.

승현이에게도 그저 끄덕끄덕 들어주었던 기억밖에 없는데

나 때문에 3년 동안 학교생활 잘 버텼다고 교복 이쁘게 차려입고 감사인사를 하러 왔다.





작년에 보건실에서 자위행위를 한 학생이 적발된 이후 큰 충격을 받고, 

학생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 참 고민을 많이 했었다.

친절함과 만만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일부러 사무적으로 대하려는 날들도 많았고, 승현이 같은 경우도 꾀나 사무적으로 대했던 날도 많았는데

그래도 고맙다고 해주니..

나의 선생으로서의 사명감을 조금씩 되살려 주는 것 같아서 내가 더 고맙다.


작은 도움이 되고 싶었던, 너희들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저 이야기 들어주고 따뜻한 물 떠다먹이던 나의 진심을 알아줘서 너무 고맙다.


대학교 가서도 마음 잘 지키고 건강하고 꼭 행복해야 해!!  

 










매거진의 이전글 호구선생님 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