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실이야기] 수염이 자라는 학교

면도기도 구비를 해놔야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

by 정은

조회시간이 끝난 직후의 보건실은 그야말로 시장통이 따로 없다.

출결규정이 엄격한 인문계 고등학교 인 탓에 학생들은

쉬는 시간에 필요한 진료나 처치를 받기 위해 일제히 보건실로 몰려든다.

오늘은 다른 날 보다 훨씬 더 정신이 없었다.

축구하다가 공에 맞은 남학생이 코피를 철철 흘리며 들어와서

정신없이 처치를 하고 있는데, 끊임없이 학생들이 밀려든다.

한 명씩 번개 같은 속도로 처치를 끝내고 있는데

어떤 남학생 쭈뼛쭈뼛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혹시 보건실에 면도기 있어요?”


면도기.png

아침부터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

하긴.. 학교에서 각종 필요한 물건을 떠올릴 곳이 보건실과 교무실 이외에 별로 없긴 하겠다.


"면도기는 보건실에 없네. 미안하지만 교무실 가서 여쭤보는 건 어떨까? 미안~ 다음 학생!!"
다른 때 같으면 보건실에서 면도기를 찾는다고 잔소리를 좀 했겠지만은

오늘은 너무 바빠서 얼른 이 학생을 패스해야 했다.

"교무실에 가면 면도기가 있을까요?"

".........."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솔루션을 제시했다.

"음 친구야. 교무실에도 면도기가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만약에 있더라도 개인 위생용품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수 있는 물품은 아니기도 해. 담임선생님께 외출 허락을 받고 요 앞 편의점에 가서 하나 사 오는 걸 추천해요."

"아! 네 좋은 방법이네요!"

마치.. 유레카! 하듯 경쾌하게 외치며 보건실을 나서는 남학생을 보니

작년에 있던 학교의 털보 아저씨 한 명이 떠오른다.




점심시간이었다.

한 남학생이 절뚝이며 보건실에 들어왔는데, 농구하다가 발목을 삐었단다.

부종과 통증이 좀 있는 편이라 얼음찜질하고, 붕대 꽁꽁 감고,
주의사항까지 챙겨줬다. 바쁜 시간이라 아픈 부위를 집중적으로 보느라 얼굴을 못 보고 있었다.


“며칠은 심한 활동 하지 말고, 이 쪽 부분이 큰 인대가 3개나 지나가는 곳이니까

계속 붓거나 아프면 병원 가서 진료 좀 받아보세요."


열심히 주의사항을 설명하며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본 순간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했다.

…응? 누구세요?

고등학생이 아니라 털보 아저씨가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단순히 코 밑에 살짝 있는 수준이 아니라,
하관 전체를 장악한 야심 찬 비어드 스타일. 와우!




자세히 보니 농구 좋아하기로 유명한 내가 아는 그 민수가 맞다.

"어머머! 너 수염이 그게 뭐야?!

이 녀석, 아주 뿌듯한 얼굴로

"이번 주 농구대회 나가요.
제가 좋아하는 선수 따라 수염 길러봤어요."


풉! 실소가 나왔지만 꾹~~ 참았다.

"아니 민수야!! 농구대회면 농구 연습을 더 해야지! 고등학생이 수염이 웬 말이야~~ 눈에 띄긴 한다마는.."


"아 쌤!! 제가 농구 실력은 이미 완성형이니까, 이젠 외모도 완성형으로 만들어야죠

저 수염 기르니까 좀 괜찮죠? 여자애들이 자꾸 쳐다보던데요!"


… 하고 싶은 말이 마구마구 솓아올랐지만, 꾹~ 참았다.




고등학교에 있으면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성장과정을 보게 되는데

남학생들은 어느 날 갑자기 털도 자라고, 말도 어른스럽게 하고,

갑자기 예의 바른 청년이 되어있기도 한다.

여학생들의 성숙한 아가씨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늘 아침 면도기 찾던 그 친구도

자기도 모르게 삐죽삐죽 자란 수염을 발견하곤 나름 당황하면서 보건실을 찾았겠구나 싶다.

혼내지 않길 잘했네.

찬찬히 잘 설명해 주길 또 잘했네.

그런 의미에서 면도기를 좀 구비를 해놔야 하나... 잠시 고민을 더 해봐야겠다.

중요한 건 나도 면도기 사용법을 모른다는 사실 ㅋㅋㅋ


https://www.youtube.com/shorts/MiCjJ8viO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