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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말랑 Oct 10. 2020

서툴기 때문에 빛나는 시간들이 있다

애국가부르기

아이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치원에서 새로 배운 거, 궁금한 거, 자기 자랑들을 아무런 맥락 없이 마구 쏟아낸다.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하면서 일기를 쓰는 것 같기도 하고 까먹지 않기 위해 복습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은 아직 자신이 배우지 못한 커다란 세상보다는 자기가 배운 작은 세상을 소중히 여길 줄 안다.



주니는 요즘 유치원에서 대한민국에 대해 배우고 있다. 얼마 전에는 태극기를 그린다며 크레파스를 꺼내 놓고 낑낑거리더니 이번 주에는 애국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애국가 1절은 공책을 펴 놓고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쓰고, 2절부터는 듣고 따라 부르는 연습을 한다. 여러 번 반복해서 듣다 보니 주니도 자연스럽게 외우게 됐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저녁 샤워를 하며 주니가 자신 있게 애국가를 열창했다.

남산 위에 죠스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를 부르는데 난데없이 죠스나무라니. 이 놀라운 상상력에 빵터지고 말았다.

주나~ .죠.스.나.무.가 아니라 .저.소.나.무.야.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아! 제가 다시 해 볼게요!

주니는 해맑게 웃으며 바로 고쳐 불렀다.

남산 위에 젖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죠스나무가 아니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젖소나무라고 한다. 들리는 대로, 이해하는 대로 부르려니 알고 있는 지식의 세계가 총동원됐다. 그러고도 6살 아이의 어휘력으로 애국가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니의 상상 속 남산 위에는 도대체 어떤 나무가 서 있는 걸까. 더 이상 바로 잡을 수 없어 그냥 혼자 웃고 말았다. 조금만 더 자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기에. 오히려 오늘 자기가 불렀던 죠스나무며 젖소나무를 잊게 되겠지. 조용히 기록해 두었다. 주니 어록으로.



아이들과의 이런 대화에서 어른들이 박장대소하면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웃는 이유를 모른다. 이모 욕심으로는 오래오래 계속계속 몰랐으면 좋겠구나. 이 웃음을 이해하는 순간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을 테니까.


서툴기 때문에 빛나는 시간들이 있다.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틀려도 당당한 것이 아이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완벽해지고 나면 조금 덜 알고 있던 그 세계를 모두 잊게 된다. 기록하지 않은 순간들은 모두 사라지기에 아이들이 자기만의 세상을 엮어가는 과정을 부지런히 주워 담았다. 잘 접어 두었다가 기운이 빠지는 날 펼쳐보면 내 안 어딘가에 쪼그라들어 있던 신선함이 빵빵하게 충전된다. 내 얼굴에 웃음을 그려주는 순간들이 사랑스럽다. 모든 이모들이 조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순간순간을 기록하고 한 권의 어록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따뜻하고 눈부신 세계가 펼쳐질까.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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