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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말랑 Oct 24. 2020

이모는 추억을 쌓아주는 사람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아름답고 신성한 추억만 한 교육은 없을 것이다.

마음속에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악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추억들을 많이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삶이 끝나는 날까지 안전할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비가 계속 내렸다. 주니지니는 이틀째 집에 갇힌 채 시간을 보냈다. 점심을 먹고 밖을 살펴보니 우산을 쓴 사람이 반이고 우산을 쓰지 않은 사람이 반이다. 이 정도면 비 오는 날씨 체험하기에는 딱 좋다. 마음껏 비가 내린 후라 공기까지 투명했다. 주니지니에게 잠깐이라도 바깥바람을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 애들아. 나가자! 비 오는 날엔 장화만 신으면 외출 준비는 끝이다.


아이들은 비를 맞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우산까지 내팽개치고 일단 신나게 놀고 본다. 물이 고인 곳마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다. 물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천하무적 장화를 신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주니지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웅덩이로 뛰어들었다. 샤워나 빨래는 아이들 몫이 아니니까. 내일 감기 걸리는 것은 내일의 문제니까. 아이들이 힘차게 발을 구르자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까르르까르르. 저 웃음을 보고 싶어서 내가 비를 기다렸지. 아이들 웃는 얼굴 한 번에 추억이 하나씩 쌓였다.


날씨가 요동 치는 날이면 우리는 모험을 떠났다. 우리는 잔잔한 날에는 해 볼 수 없던 장난들을 마음껏 펼쳐 놓았다. 날씨가 주는 선물은 돈을 주고도 경험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엄마라면 뒷처리가 두려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일도 나는 기꺼이 아이들과 같이 뛰어들었다. 까짓거 샤워시키고 빨래 하지 뭐. 우리는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을 굴렀고 비를 맞았다.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빗물로 머리를 감는 시늉을 하면서도 즐거웠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나부끼는 낙엽을 쫓아 힘껏 달리며 온 몸으로 바람을 담았다. 아이들이 그 느낌에 충분히 젖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이럴 때면 엄격한 규율에서 살짝 비켜서 있는 이모라는 자리가 참 좋았다.



이모는 추억을 쌓아주는 사람이다. 아이들에게 추억이란 꼭 해외여행을 가고 대단한 경험을 해야 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은 동네 놀이터에 나가 달리기만 해도 즐겁다. 지난 시간에 어떤 감정이 녹아 있다면 순간은 추억이 된다.


나는 살아가면서 대부분의 것이 바뀐다고 믿는다. 생김새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생각과 마음가짐들도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더해지고 아예 다른 것으로 바뀐다. 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우리에게서 떼어버릴 수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어린 시절은 그중 하나다. 어른이 되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아주 많은 돈을 들여 얼굴 전체를 싹 고치더라도 어린 시절의 기억은 마지막까지 바꿀 수 없는 영역이다.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 안에 남아 있어 아이들의 인생에 여러 가지 형태로 영향을 준다. 그러니 나는, 아이들의 화창한 미래를 걱정하는 대신에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아주고 싶다. 아이들은 나와 함께 했던 지금의 시간들을 모두 잊을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무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더라도 지금의 좋았던 감정들은 끝까지 남아 아이들을 지켜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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