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다고 투정 부리는 제게 P언니는 여행을 가보라고 제안했지만, 내키지 않았어요. 아쉬람에서 한국인 언니들과만 어울려 다니는 일상이 지루했던 거였거든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습니다.
오쇼 아쉬람에서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어요. 일을 하거나 멀티버시티(Multiversity)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멀티버시티는 요가, 그림, 도자기, 테라피 등에 명상을 결합한 특별 프로그램들인데, 일정 기간 동안 별도의 비용을 내고 프로그램 리더가 이끄는 그룹에 참여하는 것이었어요. 당시 제 형편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라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죠.
우선, 일자리에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마침 밀레니엄을 맞이해서 ‘Osho 2000 Festival’ 행사 준비를 도와줄 사람을 찾는다는 공고문을 봤어요. 용기를 내서 인터뷰를 하러 갔습니다. 담당자는 흰색에 가까운 옅은 금발에 밝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Taro라는 이름의 백인 중년 여성이었어요.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며 물었어요.
“What kinds of idea do you have?”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혀가 굳어버렸습니다. 저는 그저 일을 돕겠다고 찾아가면 반가워하며 할 일을 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떤 아이디어가 있냐고 물으니 당황했죠. 어설픈 영어로 더듬거리며 아이디어가 생기면 찾아오겠다고 말한 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일에 도전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멀티버시티 중 돈이 많이 들지 않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기로 했습니다. 아쉬람 안내 센터인 오쇼 플라자에 찾아가 게시판을 살펴봤어요. Meera라는 사람이 리더인 ‘The way of creator’ 프로그램 공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3일 동안 그림을 그리는 페인팅 클래스인데, 가격은 6천 루피. 우리 돈으로 18만 원 정도였어요. 프로그램 기간 동안 그림 재료와 도구를 주는 것을 고려하면 적당한 가격으로 보였습니다. 다음 날 오후 1시 15분에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Demo(시연회)가 있다고 해서 참석해 보기로 했어요.
점심을 먹고 Demo 시간에 맞춰 오쇼 플라자에 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흥겨운 음악과 함께 제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녀 두 사람이 원을 그리듯 춤을 추며 바닥에 놓인 흰 종이에 물감을 뿌리고 있었어요. 남자는 짙은 갈색 머리의 백인이었고, 여자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자그마한 체구를 지닌 검은색 머리의 동양인이었어요. 두 사람은 무척 신나고 즐거운 표정으로 밝게 웃고 있었습니다. 부러웠어요.
그룹의 리더인 Meera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무대 오른쪽에서 두 남녀를 보며 즐거운 듯 웃고 있는 한 동양인 여성이 눈에 띄었어요. 170cm 정도 되어 보이는 큰 키에 날씬한 몸매, 가늘고 긴 팔다리, 적당히 그을린 매끄러운 피부, 허리까지 닿는 검고 긴 생머리. 어쩐지 그녀일 것 같았습니다. 퍼포먼스가 끝나자 그녀가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어요. 춤을 추던 여성과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두 사람 모두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았죠. Meera는 영어로 짧게 프로그램 소개를 한 뒤, “당신의 명상이 성장할 때, 당신의 그림도 성장한다.”라고 마무리했어요. 인상적인 말이었습니다. 데모를 본 뒤 마음을 정하고 바로 등록을 했어요.
클래스 시작 첫날, 오전 9시 45분. 설레는 가슴을 안고 붓다홀 맞은편 오쇼 크리슈나 하우스 2층으로 갔습니다. 50평 정도 크기의 탁 트인 공간에는 넓은 창을 통해 밝고 따뜻한 햇빛과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어요. 그룹 인원은 스무 명 남짓으로, 반은 일본인, 나머지 반은 이탈리아 또는 프랑스 등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었어요. 한국인은 저 혼자였습니다. Meera가 출석을 부르는데 제 한국 이름의 발음이 재미있게 들렸는지 다들 웃음을 터뜨렸어요. 민망하고 부끄러워져서 어쩐지 위축이 되었죠.
방 한쪽에는 전지 사이즈의 흰 종이와 아크릴 물감, 잉크, 붓 세트 등이 준비되어 있었어요. Meera는 우리에게 주어진 재료와 도구를 이용해서 마음 가는 대로 표현하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고, 저는 주로 노랑, 빨강 등 밝고 선명한 색의 물감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어요. 50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났습니다. 15분 동안 휴식 시간을 가진 뒤에 다 함께 눈을 감고 앉아 Meera가 준비한 오쇼의 강의를 들었어요. 그 뒤, 점심을 먹고 또다시 그림을 그렸습니다. 제 옆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제 또래의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지닌 다정하고 착해 보이는 백인 여성이 있었어요. 그림 그리는 도중에 Meera가 시키는 파트너 활동이 많았는데, 그녀와 자주 함께 했어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도중에 그만뒀다고 하더군요. 공통점이 많아서 금세 친해졌습니다. 즐거웠어요.
첫날 클래스는 쿤달리니 명상이 시작되기 전, 4시 15분쯤 끝났어요. 리더인 Meera의 영어는 일본어 악센트 덕분에 알아듣기 쉬웠고, 같은 인종의 여성이라 그런지 왠지 마음이 놓였습니다. 처음 그녀의 모습을 봤을 때는 많아야 30대 후반 정도일 거라 생각했어요. 외모뿐만 아니라 분위기가 세련되고 활기차 보였거든요. 하지만, 그녀는 당시 제 어머니 또래인 50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요즘에는 한국에도 자기 관리를 잘해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50대 여성들이 많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Meera의 사진과 소개글
Meera는 항상 우아하고 따뜻한 미소를 띤 채 유럽인들과 막힘 없이 소통했고, 유럽에서 유학 후 화가로 활동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탈리아어로 농담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참 멋있게 보였어요.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세계 각국을 자유로이 여행하며 그림을 그리고 페인팅 클래스를 운영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제 주위에서 쉽게 만나볼 수 없는 타입의 사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