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스 둘째 날은 오전 8시에 모였어요. 붓다홀 주변에 둘러앉아 정원의 꽃과 나무를 그렸습니다. 두 시간 뒤, 오쇼 크리슈나 하우스 2층에 모였어요. 그리고 첫날 그렸던 그림을 파트너와 바꿔서 그린 후, 서로 상대방의 그림에 대한 싫어하는 감정과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 파트너는 클래스에서 Meera를 도와주는 헬퍼(helper), 일본인 남자 아키도였어요. 깡마른 몸에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 남자였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는 수도승 같은 이미지였죠. 그는 좋은 감정을 표현할 땐, 미소를 띠며 손짓까지 섞어 제 그림이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싫은 감정을 표현할 때는 제 그림이 온통 흰색과 노란색으로 뒤덮여 있어서 유치하다고 소리치며 발을 구르는 등 온몸으로 화를 표현했어요. 저는 아키도의 격렬한 감정 표현에 놀란 나머지 얼음처럼 굳어버렸죠. 그의 그림에서 어떤 점이 좋고, 싫은지에 대해 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Meera는 상대방은 다만 receiver, 받아들이는 사람일 뿐이니, 판단을 놓으라고 했어요. 하지만, 상대의 눈을 보고 말하니 쉽지 않더군요.
끝나고 나서, 제가 아주 어려웠었다고 말하자 아키도는 conditioning, 조건화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 그림에 대한 감정 표현일 뿐인데도 마치 제 자신이 비난의 대상이 된 느낌이 들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상대방 그림에 대해서도 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다른 사람과 불편한 상황에 놓이는 게 싫어서 좋고 싫고를 확실히 표현하지 않는 편이었거든요. 그 시간 이후, 그런 제 소통 방식이 올바른 것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도 오전 8시부터 붓다홀 주변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전날 밤 11시까지 그림을 그린 데다가 새벽 2시까지 R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기에 몸이 피곤했어요. 그림 그리는 게 더 이상 재미있지 않더군요. 휴식 시간에 오쇼 카페에 들렀어요. 따뜻한 물을 마시려고 보니 컵 안에 이물질이 떠있는 거예요. 카페를 관리하는 깡마른 일본인 여자에게 컵을 보여주며 문제를 설명하려 애썼습니다.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손짓을 하며 다른 컵을 쓰라고 했어요. 온수기 안에 이물질이 있는 것 같은데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화를 내며 “What can I do for you?”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놀랐지만 마음을 다잡고 차분하게 답했어요. “I just say the problem.”
그리고는 그녀가 알아들은 것 같기에 밀크티를 따라서 다시 계산대에 섰어요. 계산대에서 모든 상황을 보고 있던 일본인 남자가 그녀가 너무 심했다며 이해해 달라고 했어요. 알겠다고 얘기하고 그곳을 나왔습니다. 우연히 P언니를 만났어요. 속상한 마음에 자초지종을 얘기했죠.
“그 여자가 워낙 감정 기복이 심하고 여기 일이 많이 힘든 것 같아. 너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많이 그러니까 네가 이해하렴.”
P언니와 같이 있던 다른 한국인 언니는 그녀가 유방암 때문에 한쪽 가슴을 도려냈고, 여기 오래 있었는데 아직 남자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언니들과 대화를 나누고 난 뒤에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오쇼 아쉬람의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죠.
휴식 시간이 끝나고 클래스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Meera가 오쇼의 강의를 틀었어요. 긍정적인 상황과 부정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오쇼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어요. 강의를 들으며 한국에서 취업과 연애에 실패했던 기억과 함께 카페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오쇼 목소리의 진동이 몸속 세포를 뒤흔드는 것처럼 느껴지며 뱃속 깊숙한 곳이 떨려오더군요.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In any circumstance, real rebellious person… SAY YES.”
그 순간, 마치 어린 아기가 울음보를 터뜨리듯이 통곡이 터져 나왔어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오른손으로 입을 막고 1층 화장실로 뛰어갔죠.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었어요. 눈물, 콧물을 훔치고 다시 올라가니 오쇼의 강의는 끝났고 Meera와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어요. Meera의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이 너무 아름다워서 또 눈물이 났습니다. 어떻게 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다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Meera를 만났습니다. 그녀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볍게 감싸고 한참 동안 제 눈을 들여다보았어요. 그녀의 눈에서 따뜻한 빛이 제게 전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게 ‘마리암’ 같다고 말하며 부드럽게 안아주었어요.
다시 그림 그리기가 시작되었고, 저는 힘없이 앉아서 흰색, 노란색 등의 밝은 색 물감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Meera가 제 곁에 살며시 다가오더니 제 그림에 검은색 잉크를 떨어뜨린 뒤 스프레이로 물을 뿌렸습니다. 밝은 색 물감 사이로 검은색 잉크가 섞여 들어가 흘러내리며 새로운 색과 무늬를 만들어냈습니다. Meera는 저와 눈을 맞추며 되물었어요.
“Mysterious, isn’t it?”
그리고는 제게 잉크병을 건네며 직접 그림 위에 검은 잉크를 뿌리게 했습니다. 사실 저는 밝고 깨끗한 색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애써 만들어낸 화려한 색감의 그림이 한순간의 실수로 망가져 버리는 게 두려웠어요. 그래서 검은색을 쓰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죠. 그런데 Meera가 시킨 대로 하니, 화사하지만 밋밋했던 제 그림에 검은색이 섞여 들어가 신비로운 깊이가 느껴지는 거예요. 제가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였습니다.
그 후 제가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규칙을 깨고 여러 가지 색을 자유롭게 사용하며 그림을 그렸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그리는 그림은 더 이상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제가 있었어요. 종이 위에 있는 모든 컬러와 터치가 그대로 저 자신이 되는 듯했어요. 순수한 몰입, 무아지경의 경험이었습니다. 명상을 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명상이었어요. Meera는 그림은 거울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연결 고리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림 그리기는 relating, 관계 맺기를 배우는 것이라고도 했죠. 그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린 그림처럼, 저는 밝고 순수한 감정을 지켜내기 위해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 외면하며 억누르고 있었던 거였어요. 오쇼의 강의를 들으며 그 사실을 깨달았고,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눈물은 그렇게 계속 억눌렀던 감정의 표현이었습니다. Meera는 검은색 잉크를 통해 그런 제 마음을 읽어봐 주었던 거예요.
끝날 때쯤 되자, 클래스를 들었던 모두에게서 놀랄 만큼 아름다운 그림이 탄생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둥글게 둘러앉아 각자의 경험과 감상을 말했어요. 어떤 이탈리아 아저씨는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클래스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포옹을 하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눴어요. 포옹을 할 때마다 다른 이들로부터 따뜻한 에너지가 물밀듯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본인 여성들은 포옹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현했고, 그 곳에는 사랑이 가득했어요.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나니 마치 샤워를 한 듯 개운했고 온몸에 솜사탕 같이 부드러운 에너지가 감싸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