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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아 Feb 18. 2023

The Art of Dying 죽음의 예술

No Beginning, No End 오쇼 아쉬람의 장례식

만일 당신이 진짜 삶을 살기 원한다면, 당신은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오쇼 라즈니쉬, “The Art of Dying 죽음의 예술” 中




매일 아침 다이내믹 명상이 끝난 뒤 오쇼 아쉬람의 붓다홀에서는, 한 시간 동안 살아생전 오쇼의 강의를 녹화해 놓은 동영상을 틀어주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강의 제목이 ‘The Art of Dying: 죽음의 예술’인 것을 보고 마음이 이끌렸어요. 20대 초반이던 당시, 저는 ‘죽음’에 대한 몇 가지 특별한 기억으로 인해 마음 한 구석에 항상 죽음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있었거든요.


첫 번째 기억은 열 살 무렵 밝은 햇살이 비추는 따뜻한 봄날에 어머니, 어린 동생들과 함께 아파트 화단 옆을 걷고 있던 때였어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문득,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동시에 죽고 있겠지’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머니에게 그런 제 생각을 말하자, 어머니는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황당해했죠. 어쩐지 속상했습니다.


두 번째 기억은 열두 살 여름, 외가 친척들과 함께 동해안 낙산 해수욕장에 놀러 갔던 때였어요. 사촌들과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 어른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호기심에 이끌려 가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잘 생긴 남자가 온몸이 옅은 보라색으로 변한 채 모래 위에 누워있었습니다. 제 곁에 서 있던 외숙모는 혀를 끌끌 차며 간 밤에 술 마시고 바다에 들어갔다가 변을 당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사람의 일찍 끝나버린 젊음과 잘 생긴 외모가 안타까웠습니다.


세 번째 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어느 날, 2학년 때 같은 반 부반장이었던 활달한 성격의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어요. 정신병을 앓고 있던 엄마에게 동생과 함께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TV 뉴스에도 나왔었습니다. 놀랐어요.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내성적인 저와 달리 항상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그 아이가 부러웠었거든요.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습니다.


네 번째 기억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문과 전교 1등이었던 같은 학년 친구가 희귀병을 앓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습니다. 서울대 법대를 진학하겠다는 꿈을 품고 열심히 공부했던 친구였어요. 죽음 앞에 놓인 사춘기 소녀에게 서울대 법대 진학이 그렇게도 중요한 일이었을까 생각하며 한 동안 꽤 우울했습니다.


저에게 ‘죽음’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았어요. 인간은 모두 언젠가 죽기 마련이기에 확실한 미래인 ‘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도 의문이었죠. '죽음'이 무섭고 두렵기도 했고요. 그래서 “The Art of Dying”이라는 강의에서 오쇼가 죽음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과 달리 강의의 핵심 주제는 죽음에 대한 게 아니었어요. 삶과 생명이었습니다.  오쇼는 죽음이 생명의 끝 또는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과정의 일부분이라고 했어요. 만일 죽음이 생명의 끝이라면 생명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고 어디까지가 끝인지 분명히 정의 내릴 수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난자가 생산되기 전에도 생명은 존재했고, 그전에도, 더 오래전에도 생명은 항상 존재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생명의 연결고리에 속한 일부분일 뿐이라는 게 오쇼의 주장이었습니다.


오쇼는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는 ego, 자아 때문이라고 했어요. 삶과 죽음의 진정한 반대 개념은 ego이며, 인간은 자신의 ego 때문에 삶과 죽음 양쪽 모두를 두려워하는 것이라 말했어요. 오쇼는 ego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ego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내면의 빛을 따라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살라고 했습니다. 매 순간 과거의 자기 자신을 떠나보내며, ego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서 사랑하고, 춤추고, 축복하며 살아가라고 했어요. 그것이 진짜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강의를 듣고 붓다홀을 나서니, 아쉬람 출입문 밖에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썩했어요. 걔 중에는 노란색과 오렌지색 꽃을 엮어서 만든 목걸이를 걸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주변에 물어봤어요. 오쇼의 산야신인 스무 살 인도인 청년이 오토바이 사고로 죽어서 Death Celebration을 한다는 거예요. 호기심이 생겨서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되자, 오렌지색 천으로 덮인 시신이 누워있는 관을 어깨에 둘러맨 건장한 인도인 남자들이 나타났어요. 그들의 뒤를 붉은색 로브를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따라갔습니다. 마치 거리 축제 같았어요. 그렇게 30분쯤 걸어가니, 화장터가 있는 강변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이 화장터에 준비되어 있던 나무 더미 위에 시신을 얹고 불을 붙였어요. 그리고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다 함께 “No beginning, No End”라는 노래를 조용히 불렀습니다. 마음이 평온해졌어요.


죽음에 대한 오쇼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관점에서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을 것 같아요. 하지만, 오쇼의 아침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축복해 준다는 새로운 관점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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