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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넘게 여왕을 지킨 만년필

by 방구석 지식in


체스에서 킹은 한 번에 한 칸씩만 움직일 수 있지만,
퀸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에나 갈 수가 있어.

- Ava Max, King & Queens -



빌보드 인기 여가수 아바 맥스의 노래 가사처럼 현대사를 풍미한 여왕이 있었습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가 그렇습니다. 2차 세계대전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겪었고,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부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까지 전 세계 정상들을 두루두루 만났습니다. 걸어 다니는 현대사 백과사전인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국민들을 넘어 전 세계 국민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70년 재위 기간 동안 여왕의 곁을 지킨 만년필 한 자루가 있었습니다.



■ 여왕 즉위 전부터 애용...'파커 51' 선호


엘리자베스 2세는 여왕 즉위 전부터 만년필을 애용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파커 51을 좋아했는데,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같은 기종의 만년필을 사용한 것이 공식석상에서 확인됐습니다. 특히 지난 1992년 영국 BBC가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도 여왕이 자주색 파커 51로 집무실에서 서명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파커는 설립된 지 130년이 넘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만년필 제조사로, 파커 51은 단일 품목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됐습니다. 손잡이와 만년필 굵기 등을 고려해봤을 때 필기에 가장 적합한 만년필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도 자주색 파커 51을 선호했는데, 수수하면서 화려하지 않아 여왕의 취향에 잘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자주색은 예전부터 왕권을 상징하는 색으로 고풍 있고 독특한 아우라를 보여줬습니다.


주목할 것은 만년필을 잡는 여왕만의 스타일입니다. 일반적으로 만년필 뚜껑을 꽂을 때 클립이 자신의 바깥쪽을 향하게 꽂는데, 여왕은 이와달리 자기 쪽을 향하게 꽂았다고 합니다. 만년필 애호가로서 본인만의 취향이 있던 겁니다. 만년필로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사실 만년필 글쓰기는 과유불급입니다. 힘을 세게 주면 펜 끝의 촉이 갈라지지만, 또 약하게 잡으면 글씨가 잘 써지지 않습니다. 사용도 번거롭고 가격도 비싸지만, 선 굵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과 펜촉과 종이에 접촉하는 면이 넓어 본인만의 필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것은 만년필만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이 담겨있는 겁니다.



여왕 즉위 70년, 현대사를 함께한 만년필


엘리자베스 2세는 25세부터 여왕에 즉위했습니다. 영국 여왕의 권위에 편한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질곡 한 현대사를 경험했습니다. 지난 2014년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투표부터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지은 브렉시트까지 영국 내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눈을 밖으로 돌려도 그렇습니다.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상대로 한 전쟁인 걸프전부터 2008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격변하는 전 세계 지각변동을 온몸으로 부딪혔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영국 여왕의 곁을 지켰던 만년필 한 자루가 있었습니다. 각국의 정상을 만날 때마다, 중요한 사건의 친필서한을 할 때마다 여왕은 자신의 한쪽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역사적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무겁기만 한 왕관의 무게를 만년필이 함께 했던 걸까요. 여왕은 영국인의 정신을 이해한다던 어느 교수의 말처럼 여왕의 한편에서 현대사를 지켜본 만년필에도 그 혼이 심어져 있을 겁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2세라 썼지만 한가정의 어머니로서, 남편의 아내로서, 평범한 여성의 삶으로서 지내길 바라던 애환도 있었을 겁니다. 때론 엄하게, 때론 다정하게, 때론 수수하게 말입니다. 굴곡진 현대사가 태풍처럼 개인의 삶을 휘몰아쳤지만, 그 안에서는 한줄기의 소소한 물줄기가 있었을 겁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2세의 서거를 두고 전 세계에서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축복하기 위해 꽃을 든 추모객들로 운구 행렬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님은 갔지만 나는 보내지 않았다는' 한용운 시의 한 소절처럼, 여왕은 그렇게 갔지만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기억될 겁니다.


'왕관을 짊어지는 자, 그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는 말처럼, 그동안 왕관이 무거웠을 겁니다. 여왕님의 환한 미소처럼 이제는 편한 곳에서 한 자루의 만년필과 함께 편히 쉬십시오.




<작가가 궁금하다면?>

[브런치북] '희로애락' 공무원 생존기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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