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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과 여의도, 모두 미생이다

노량진에 오기까지

by 방구석 지식in
합격해서 입사하고 보니까 성공이 아니라,
그냥 문을 하나 연 것 같은 느낌이더라.

- 미생 -


고등학교 때 선생님 말씀은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들은 대학교만 잘 들어가면 인생은 고속도로라고 했습니다. 원하는 대기업은 골라서 들어갈 수 있고 얼굴 예쁜 여자들도 쉽게 만난다고 흰소리를 늘어놓았지요. 그런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곡소리가 납니다. 굴곡진 비포장도로의 연속입니다. 하루에 4~5시간씩 자면서 죽기 살기로 공부했고 대학을 가보니 현실은 딴판이었던 겁니다. 주변에 SKY 대학을 들어간 친구들도 그랬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도 그랬습니다. 연봉 높은 대기업에 들어가도, 또 능력 있고 예쁜 이성과 결혼을 해도 인생은 끝이 아닌 듯합니다. 끝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문을 하나 연 것에 불과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언제쯤 꽃이 필까요.


드라마 미생은 곧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습니다. 취업과 결혼, 출산을 포기한 이른바 'N포 세대'들을 위한 일기였습니다. 코로나 고용한파로 얇아진 지갑만큼 자존감도 낮아졌습니다. 인생도 바둑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네 인생은 누가 옆에서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잘못 둔 수는 여러 번 무를 수도 없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둘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먹이사슬의 꼬리칸에 방치된 정글 같습니다. 스펙도, 경력도, 경험도 없고 또 있어도 회사를 나가는 것은 똑같습니다. 옛날처럼 회사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술술 풀리던 시대도 지났습니다.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에 일 년에도 몇 번씩 오르는 밥상물가에 직장인들 허리만 휩니다. 월급만 빼고 다 오르는 것 같습니다. 숨통 막히는 회사 분위기는 또 어떻고요. 국장님인지 청국장인지, 사장님인지 제사장인지 묵묵부답에 함흥차사입니다. 통했냐고요? 아니요, 토했습니다. 소통 없고 비전 없는 조직에서 오늘도 MZ 세대들은 회사를 떠납니다.



■ 노량진과 여의도, 한국의 자화상


노량진과 여의도는 우리 대한민국의 자화상입니다. 스스로를 그린 우리 면면의 초상화입니다. 기쁨과 슬픔, 애환이 서려있습니다. 노량진과 여의도는 불과 지하철로 2~3 정거장 거리입니다. 올림픽대로를 건너면 바로 갈 수 있습니다. 63 빌딩 아래로 노량진과 여의도가 한눈에 보이는데, 과장해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입니다. 그래서인지 가만히 보면 다른 듯 묘하게 닮았습니다. 저 역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처럼 노량진과 여의도 구석구석을 다녔습니다. 직업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은 구보씨가 하루 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소설에 담겼다면, 저는 20대와 30대 애환이 서린 이야기입니다.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보고 들으며 함께 가슴 아파했습니다. 20대 때는 구두가 닳도록 여의도 방면을 뛰어다녔고, 30대 때는 동전 한 닢을 들고 운동화에 땀이 나도록 걸었습니다.


노량진은 청춘들의 애환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노량진은 취업시장의 종착역입니다. 막노동을 뛰면서 공무원 준비를 하는 수험생부터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는 경력 단절 여성, 가는 곳마다 줄줄이 떨어지고 9회 말 2 아웃의 청춘을 쓰고 있는 중고 신입들의 이야기까지 한 편의 영화와 같습니다. 그중에는 학원 선생님까지 찾아가 돈을 빌리는 수험생들의 사연도 있습니다. 인생 낭떠러지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말하지 않아도 잘 압니다. 다들 저마다의 눈물이 가슴에 사무쳤을 겁니다. 수업을 듣다가, 식당에서 밥을 먹는 도중에 독특한 상황도 연출됩니다. 지역과 계층 세대를 아우르는 애환이 있습니다. 20대의 앳된 대학생부터, 머리에 서리가 앉은 50대 공시생까지 뒤엉켜있습니다. 나이만 어리다고 청춘이 아닙니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고 있다면, 그게 청춘입니다. 아프니까 청춘 아닐까요.


여의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만의 리그는 치열하듯, 여기서도 청춘들의 애환이 느껴집니다. 번듯한 직장에 높은 연봉을 받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을 입고 다닙니다. 점심에는 또 어떻고요. 스타벅스 커피 한잔을 들고 우아하게 거리를 걸어 다닙니다. 가는 곳곳마다 '런웨이'를 방불케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들도 속이 곯아 터진 경우가 많습니다. 월화수목금금금 일만 합니다. 저녁이 있는 삶은커녕, 주말이 있는 삶도 힘든 경우가 허다합니다. 미국에서 유명 MBA를 졸업하고 외국계 은행에서 연봉 1억을 받고 있는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월급날과 소개팅할 때만 행복하다는데, 양복 안주머니에 사직서를 들고 다닙니다. 주말에 술 한잔 하자고 연락하면, 회사 때려치우겠다는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대기업, 은행 등등 다른 직종도 그들만의 말 못 할 애환이 있습니다. 대기업에 취업한 여성들도 사연이 많습니다. 결혼까지는 잘했다고 해도, 출산에 육아라는 산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법적으로 보장된 3년은커녕 1년도 눈치 보면서 육아휴직을 씁니다. 6개월쯤 되면 불이나게 회사에서 전화가 오거든요.



■ 우리는 모두 미생이다...성공은 마음속에


우리는 모두 미생입니다. 취업준비에 한창인 취준생도, 노량진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공시생도, 여의도에서 구두가 닳도록 뛰는 직장인도 그렇습니다. 저마다의 리그는 치열합니다. 뉴스만 봐도 이런 상황은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기사에 따르면 입사한 이후 2년 안에 퇴사하는 신입직원들은 전체의 50%에 달합니다. 일해도 성공 못한다는 인식이 사회 전역에 퍼지면서, 오랜 시간 근무하고 열악한 조직 분위기를 참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녀세대들이 부모세대들보다 가난한 첫 세대라는 점도 가슴 한편을 쓸어내리게 합니다. 하루에 4~5시간씩 자면서 공부를 하고 명문대를 가도, 높은 학점과 고 스펙에 좋은 직장을 가더라도 그래 봤자 월급쟁이라는 겁니다. 합격을 해도 문제, 떨어져도 문제입니다.


결국 성공도 어떤 의미를 두는지가 중요한듯 합니다. 실패가 성공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고, 성공한 이후에 나태해져서 인생 내리막길을 걷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리학자 안젤라 덕 윅스가 언급한 '회복탄력성'은 눈여겨 볼만 합니다. 진흙길을 걸으면서 몇 번이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회복력입니다. 우리 모두는 시궁창에서 살아가지만 몇몇은 별을 보고 있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결국 세상이 기준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적으로 상황을 느끼는 겁니다.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습니다. 노량진에서, 여의도에서 그밖에 어디에서도 지지 않기 위해 마운드를 오르는 9회 말 2 아웃의 청춘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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