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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지식in Sep 24. 2022

벼랑 끝에서 만난 보랏빛 붓꽃

노량진 언저리에서


1889년 5월. 어느 환자가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것도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겁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경련, 등에는 식은땀으로 젖어 있습니다. 실핏줄이 곤두서 있고 가쁜 숨을 연거푸 내쉬고 있었습니다. 뜨는 해를 하염없이 지켜보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을 마감하고 싶었을 겁니다. 아침 해가 그를 재워 줄 때까지 지친 목소리는 끊임없이 갈구하고 염원했습니다. 복잡하게 꼬인 머릿속의 고민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웃거나 울거나 아프거나 달거나 쓰거나 그렇게 시간은 흘렀을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늘어나는 약봉지를 하염없이 지켜보는 것뿐이었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발작과 혼란은 그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으니까요. 물감을 씹어먹을 정도로 발작 증세는 심했습니다. 참다못한 동네 사람들로부터 그를 감금하라는 요구가 빗발쳤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절망의 끝에는 한줄기 붓꽃이 있었습니다. 낭떠러지에서 희망의 빛을 본 겁니다. 그가 입원한 정신병원 밖에는 소소한 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아기자기하게 숨어있는 보라색 붓꽃과 야생화들에 고흐는 심심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실낱 같은 기대였습니다. 마지막 잎새처럼요. 반 고흐는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은 오직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 여기고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걸작이 '아이리스'였습니다. 그의 솔직한 고백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나와있습니다. '이곳으로 오길 잘한 것 같다. 요즘 보라색 붓꽃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생겨나고 있다'라고 전한 겁니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한 겁니다. 작은 야생화에서요. 진흙 속에서 꽃이 피었습니다. 고흐는 그때 집중력으로 불과 1년 사이에 130점에 달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때 고흐가 그린 '아이리스' 그림은 1987년 가격으로 한화 565억 원 상당에 팔렸는데, 당시 가장 비싼 미술품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별이 빛나는 밤에'와 '자화상' 그리고 '보라색 아이리스'로 유명한 고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에 한 명인 빈센트 반 고흐도 모진 고난과 역경에 가슴 아파했습니다.



■ 보라색 아이리스의 꽃말은 행운, 소소한 위로


아이리스는 우리나라에서 붓꽃으로 불리는데, 보라색 아이리스의 꽃말은 행운입니다. 그 행운이 저에게도 찾아왔습니다. 노량진 수험가에서 올림픽 대로만 건너면 공원이 나옵니다. 여의도 샛강공원입니다. 수험생 때 종종 찾던 곳인데, 길가에 피어 있는 붓꽃의 자태를 보면서 작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처럼,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들이 잔뜩 쌓여 있는 것처럼 소소하지만 소중한 행복을 느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급한 '소확행'입니다. 작지만 진정한 행복이죠. 저도 천천히 걸으면서 머리를 식혔습니다. 시험이 끝난 뒤에도 가봤는데, 저를 반기듯 붓꽃들이 수수한 용모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잎은 난처럼 곧게 뻗었고 꽃은 보라색인 듯 자주색으로 얼룩져있습니다. 먹을 묻힌 붓과 같이 꽃봉오리는 오붓한 자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감춘 듯 화려하고, 수수한 듯 빼어난 자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 눈물이 나고, 세상이 달라질 것도 없는데 가슴이 미어진다는 붓꽃의 어느 시처럼 사연도 많아 보입니다. 어떤 사연들이 있었을까요. 청초하면서 얄궂은, 그러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이는 꽃 한 송이를 보면서 옛 추억에 잠겼습니다. 어느덧 시간도 많이 흘렀습니다.



■ 절반 이상이 정신건강 위험군...마음의 병 치유해야


노량진 수험생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도 심합니다. 서울의 동작구 보건소가 공무원 시험 준비생 800여 명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선별검사를 실시했는데, 54%의 응답자가 정신건강 위험군으로 분류됐습니다. 수험생의 80%가 불안과 무기력 등 정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관련 기사를 보면서 마음 한편을 쓸어내렸습니다. 심리상담도 필요해 보입니다. 20만 명에 가까운 공무원 수험생들이 기약 없는 합격을 기다리며 꽃다운 청춘을 보내고 있는 겁니다. 언제 붙을지도 모르면서 수년의 세월이 흘러갑니다. 노량진 수험가 현주소입니다.


노량진에서 수업을 듣고 있으면 하루에도 수차례씩 엠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립니다. 연필을 씹는 수험생도 봤습니다. 20대 후반에 머리가 없는 수험생들도 허다합니다. 스트레스성 탈모입니다. 독서실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수십 장의 포스트잇이 붙습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힘든 곳입니다. 한편으로 이해는 갑니다. 국사책을 다 외워야 90점이 나오는 시험입니다. 국정교과서 기준으로 한 번이라도 언급된 년도는 90% 이상을 암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사 20문제를 8분에 풀 수 있고, 나머지 과목의 문제를 여유 있게 보면서 안정권으로 합격할 수 있습니다. 1분 1초에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 나는 곳이니까요. 노량진 수험가에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절박하고 처절하기 때문에 마음 곳곳이 멍들어 있습니다. 마음의 치유가 시급합니다.


훗날 빈센트 반 고흐는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총구는 그의 가슴으로 향했습니다. 총구와 마주한 그는 마지막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나이 37살이었습니다. 면도날로 자신의 귀를 자른 것도 모자라 스스로 세상과 인연을 끊은 겁니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고흐가 자기 암시를 통해 마음의 병을 치유했다면 어땠을까요. 반 고흐 미술관 소장은 '자기 암시' 치유법을 말하며,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프랑스 에밀 쿠에의 자기 암시 요법입니다. 의식적인 노력이 무의식에 선한 영향을 미쳐 생각과 의지를 바꾸는 겁니다. 노량진 수험생들도, 여의도 직장인들도, 빈센트 반 고흐에게도 또 우리들에게도 길가에 꽃핀 붓꽃을 보면서 한 마디씩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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