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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지식in Sep 22. 2022

노량진 컵밥과 꼴찌들의 반란

노량진 언저리에서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지만,
애초에 승산은 없었다. 그렇게 9회 말 2 아웃,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외야수를 넘기는 홈런을
바라만 봐야 했다. 온몸의 근육을 부여잡던 긴장은
풀리고 눈이 감겼다.  

- 삼미 슈퍼스타즈와 마지막 팬클럽 -



꼴찌팀의 패전투수, 야구계의 묵은지, 비운의 아이콘, 삼미 슈퍼스타즈와 투수 '감사용'을 따라다니던 수식어였습니다. 선수들이 마운드에 들어서면 응원보다 야유가 뒤따랐고,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손을 흔들기보다는 고개를 먼저 숙였습니다. 슈퍼스타란 이름이 무색했고, 투수의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감사보다는 사과를 먼저 했습니다. 묵은 김치처럼 이들은 청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18연패를 내리 기록한 삼미 구단은 1985년 다른 팀에 팔려갔고 이듬해 구단 이름에는 빨간 줄이 그어졌습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겁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혔습니다.


꼴찌들의 뒷모습은 쓸쓸했습니다. 마운드를 책임지는 투수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로야구가 창단된 이후 20년 동안 은퇴한 투수는 모두 750명이 넘습니다. 그 가운데 50%에 달하는 선수들은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야구계를 떠납니다. 은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의 자리가 사라지는 겁니다.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한 상위 1% 선수들 뒤로는 뒷자리로 밀려난 선수들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약육강식인 우리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공무원 수험가도 정글입니다. 주경야독의 대학생 수험생부터 직장을 그만둔 중고 신입,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는 맘시생까지 노량진에는 지역과 계층, 세대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쓸쓸하게 가려진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 공무원 수험생만 20만명...1%만 합격하는 약육강식


7급과 9급 공무원 수험생은 한해 20만 명에 달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량진에서 9회 말 2 아웃의 청춘을 쓰고 있는 겁니다. 수업을 듣는 것부터 밥 먹는 것까지 쉬운 게 없습니다. 아침 수업을 들으려 새벽 5시부터 줄을 서는 경우도 봤습니다. 점심에는 닭장 같은 식당에 앉아 영어단어를 외우며 밥을 먹습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소화가 안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해도 이 중에서 1% 정도만 합격합니다. 한두 문제가 끝까지 발목을 잡는데, 그렇게 대한민국 청춘이 사그라지는 겁니다. 남을 이겨야 내가 합격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들어올 땐 20대지만 노량진을 나갈 때는 어느덧 30대가 되는 것도 금방입니다. 5급에서 7급으로, 7급에서 9급으로 줄줄이 이어지면서 청춘은 짧아지고 마음도 조급 해지는 겁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가슴 한편을 송곳이 찌르는 듯한 통증에 이불을 박차고 새벽에 나왔습니다. 편의점에서 그렇게 팩소주 한각을 사고 입속에 소주를 털어 넣었습니다. 팩소주를 마시며 노량진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오는 겁니다. 처음으로 빗물의 짠맛과 소주의 단맛을 알게 됐습니다.


'언론은 투쟁의 산물'이라는 어느 공영방송 기자의 말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때는 그게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표라 쓰고 출사표라 읽던 패기도 있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습니다. 열정과 패기만으로 세상을 바꿀 것 같았지만 현실은 냉혹했던 겁니다.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노량진에서 청춘을 바칩니다. 막노동을 뛰면서 공무원을 준비하는 수험생부터 얇은 지갑을 메우려 낮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저녁에는 학원 조교로 투잡에 쓰리잡을 하는 수험생도 봤습니다. 제가 걸어온 길이 중요했듯, 누군가의 삶 역시 고단하겠지만 숭고하다고 느꼈습니다. 치열하게, 처절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던 겁니다.



노량진 '컵밥'은 우리 사회의 청춘...꼴지들의 반란


노량진 컵밥은 우리 사회의 청춘입니다. 3천 원 남짓에 열정을 바치는 겁니다. 박수보다는 야유에 가까운 마운드를 오를 때, 지지 않는 게임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청춘을 생각하며 또 한때의 저를 기억하며 노량진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노량진에서 컵밥을 먹고 왔습니다. 37살, 한겨울 눈물에 젖은 컵밥을 먹을 때, 컵밥 아주머니께서 계란 프라이 하나를 덤으로 얹어주셨습니다. 얇아진 지갑만큼이나 움츠려 들었지만 컵밥의 따스한 온기를 느꼈습니다.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참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를 기억하며 같은 컵밥집에서 밥을 먹었는데, 우연히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서로 아무 말이 없었지만, 아주머니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요. 넌지시 미소를 보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는 훗날 영화로 제작됐습니다. 이범수 주연의 '슈퍼스타 감사용'이 그렇습니다. 골찌팀 패전투수에 비운의 아이콘은 그렇게 '도전의 아이콘'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겁니다. 꼴찌들의 유쾌한 반란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처럼 인생사 새옹지마입니다. 오르막길이 내리막길이 되고 내리막길이 곧 오르막길이 되는 것처럼요. 한번 꼴찌가 영원한 꼴찌란 법도 없습니다. 연거푸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친구가 창업으로, 중소기업 취직으로 더 잘되는 경우도 봤습니다. 아무도 관심 없는 1승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 간다'는 앙드레 말로의 명언처럼 그 꿈을 좇으면 언젠가 기회는 온다고 믿습니다. 그게 노량진 밖에서라도요.


지지 않기 위해 오늘도 꿈을 던지는 투수들을 응원합니다. 야구는 9회 말 2 아웃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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