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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지식in Sep 25. 2022

그대였을까 아니면 그때였을까

노량진 언저리에서

그 사람이 날 잊고 새 사랑을 시작할 때마다
자꾸 내가 작아지는 것 같았어. 그때의 나는
내 기억엔 눈부신데 그 사람에겐 아무 의미
 없었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낮아지더라고.
잊히는 거에 대한 초조함도 있었고.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영화 中 -



그 시절 우리는 풋풋했습니다. 풋사과처럼 시큼하고 또 상큼했던 사랑. 미숙해서 상처받고 후회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청춘의 설렘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픈 만큼 성장했을 겁니다. 아리고 떨리고 초조하고 심장 쫄깃한 그런 느낌적인 느낌들입니다. 누군가의 성장통이기도 합니다. 아물지 않은 따끔했던 그 시절, 당신들이 사랑했던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인생의 모든 사건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주인공 대사처럼, 한때 눈시울을 붉혔던 만큼 가슴 한편을 쓸어내리게 했던 만큼 지금 당신의 가슴은 따스할 겁니다.  


그때 그대도 나와 같을까요.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사랑 방정식은 늘 어렵기만 합니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상대가 우리를 사랑한다면 당연히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반응할 거라 생각하지만, 착각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한때의 저를 되돌아봤습니다. 여자 주인공(션자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남자 주인공(커징텅)은 격투기 시합에 나가는데, 션자이는 커징턴에게 유치하다고 말하죠. 커징턴 역시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며 서운함을 표현합니다. 서로의 표현방식이 서툴렀습니다. 오해의 간극이 넓어지고 원망과 불화가 쌓이고 그렇게 멀어집니다.



한쪽에 고이 접어둔 첫사랑. 서랍 속에 넣어둔 곳에서 불현듯 연락이 왔습니다. 커징턴은 션자이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됩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서 옛날의 아련한 추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납니다. 서로가 서로를 몰라 가슴 아팠던 때, 그때도 비가 왔습니다. 한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서로를 탓했습니다. 내 마음속에도 비가 오고 나도 울고 빗물의 짠맛을 느낀 겁니다.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영화를 보기만 했는데, 가슴 아픈 첫사랑을 결혼시켜 보내는 기분입니다. 소소하지만 익숙한 이야기, 잔잔한 조각들이 모여 마지막에 울림으로 다가온 영화, 아련함과 풋풋함이 묻어있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 이 세상이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게 말이야.
나 좋아해 줘서 고마워.
나도 그때 널 좋아했던 내가 좋아.

- 영화의 한 장면 -




노량진에는 매년 4월이면 하늘에서 눈이 내립니다. 벚꽃 눈입니다. 꽃피는 봄이면 화사한 벚꽃들이 거리 곳곳을 장식하는 겁니다. 즐비하게 늘어진 학원가들 사이로 벚꽃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습니다. 도로 양옆으로 벚꽃들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마치 홍해 바다가 갈라진 듯 장관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요깃거리로 꼽히지만,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은 마음이 뒤숭숭합니다. 체리 블라섬(cherry blossom)이란 이름처럼 벚꽃 눈은 누군가에게는 '썸'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쌈'이기도 하죠. 하룻밤의 불장난처럼 사랑의 첫 시작은 화려하게 꽃피지만, 끝은 타고 남은 재처럼 스산합니다. 검게 그을린 잿빛 가루처럼 초라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수업을 듣기 위해 길을 건너는데, 누구와 마주쳤습니다. 전 여자 친구였습니다. 몇 초 찰나였지만, 함께 했던 2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함께 울고 웃고 슬프고 기쁘고 맵고 짜고 달고 쓰고 온갖 감정의 번뇌가 휘몰아쳤습니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습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워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습니다. 수험서를 부여잡고 한동안 쓰디쓴 눈물을 삼켰습니다. 행복했던 추억들은 모질게도 가슴 아픈 상처로 비수를 꽂았습니다. 함께 거리를 걸었던 노량진 거리, 지갑은 얇았지만 가슴은 따듯했던 그때, 한두 시간씩 이어졌던 전화 통화들,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영화에서처럼 평행세계가 있을까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평행선상에 위치한 또 다른 세계입니다. 그때로 되돌아가 행동들을 고치고 싶네요. 결혼식장에서 커징턴은 평행세계를 생각합니다. 그때로 돌아가, 연락하고 싶었던 행동들을 실행에 옮깁니다. 첫사랑에게 고백하고 션자이가 하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습니다. 자신의 서툰 감정을 추스르고 두렵고 떨린 상황을 피하지 않습니다. 용기가 생긴 겁니다. 그리고 션자이를 따스하게 안아줍니다. 보고 싶었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결혼식장을 향하는 션자이를 마주합니다. 찰나의 순간에 그동안의 추억들이 무성 영화처럼 스쳐갑니다. 그리고 현실을 깨닫게 되죠. 레일 위에서 두 사람이 평행으로 걸었던 것처럼,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퐁등을 날렸던 것처럼 그 둘은 그렇게 인연이 아니었던 겁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옛날 연락처를 찾아봤습니다. 카카오톡에는 새로운 사진이 걸려있었습니다. 결혼식 꽃 사진이 있던 겁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에서 직면하니 생각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마음 편하게 보내줘야 할 때인걸 깨달았습니다. 기억엔 눈부신데 그 사람에겐 아무 의미 없었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한없이 낮아졌지만, 진심으로 그 친구의 행복을 빌어줬습니다. 잘되길 바랐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좋아서 얼굴 붉히며 딴청 피우던 아름답던 그날처럼 좋은 사람 만나 사랑받고 있겠죠. 찬란했던 그때 그날처럼 이제는 웃고 있길 바랍니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알싸한 청양고추처럼 맵고 양파를 깐 것처럼 눈물이 나는 게 사랑인 듯합니다.


그 시절 그때도 그랬던 것처럼, 노량진의 벚꽃들은 화사하게 피어있었습니다. 눈부시 아름다웠습니다. 그대라서 였을까요 아니면 그때라서였을까요. 비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듯, 노량진에서는 오늘도 새로운 사랑의 싹이 움트고 옛 추억들로 넘쳐날 겁니다. 알싸하고 아련한 경험들입니다. 웃고 울고 기쁘고 슬픈 청춘들의 애환이 서린 노량진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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