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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지식in Oct 09. 2022

연산군과 정조의 엇갈린 노량진


그날 세손(정조)은 지아비의 마음을 보았나이다.

- 영화 '사도' 中 -



정조는 자신의 아비가 뒤주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봐야만 했다. 임오화변. 아비의 따스한 정을 바랐던 사도와 깐깐하게 임금으로서 벽을 내비친 영조 사이의 가슴 아픈 이야기다. 동족상잔의 비극이기도 했다. 헐떡이는 사도의 숨소리가 뒤주 밖까지 들리고 이산(정조)은 오열한다.


왜 정조는 연산군이 되지 않았을까.


가신들의 중상모략 때문에 피붙이가 죽어나간 점, 세자 때부터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사사건건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힌 점은 정조와 연산군의 공통점이다. 정조는 심지어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죽은 아비를 낭떠러지로 몰아세운 벽파 세력을 보면서 정치를 해야 했다. 정적 심환지에게 4년 동안 보낸 편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정조는 연산군처럼 무오와 갑자 사화를 일으켜 궁궐을 피바다로 물들일 수 있었다. 신하들에게 '신언패'를 씌우고 신하들의 사지를 자를 수도 있었지만 정조는 연산군처럼 칼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학문을 바로 세우고 백성과 신하들을 품는 성군의 정치를 했다. 세종과 더불어 조선 전후기를 대표하는 임금으로 우뚝 섰다.


인내였다.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이야기처럼 정조는 자신의 십자가를 감내했다. 받아들인 것이다. 작은 행동거지 차이가 조선시대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과 조선 후기 성군인 정조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이는 연산군과 정조가 노량진에 대한 처신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우선 연산군의 처신이다. 경연과 신문고를 잇따라 폐지한 연산군은 역모가 두려웠다. 사대부들을 주요 섬으로 귀양 보낸 것도 모자라 노들나루(노량진)만 빼고 도성 주변의 한강 나루를 모두 폐쇄했다. 그렇게 광나루, 삼밭 나루, 동작 나루 양화나루는 모두 폐쇄됐다. 나루터로 물자와 식량이 공급됐던 조선 경제의 대동맥을 자른 것이다. 연산군의 패착때문에 중종반정은 앞당겨졌다. 스스로 발등을 찍었다.


사려 깊던 정조는 이와 달랐다.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사도를 극진히 모셨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천명한 정조는 일 년에 한두 번씩 경기도 화성에 모셔진 현륭원을 참배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노량진을 거쳤다. 그곳에서 백성들을 만나며 그들의 아픔과 애환을 들었는데,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도 궁궐 밖 행차가 많았던 이유다. 연산군과 정조의 노량진은 이렇듯 서로 엇갈렸다.     



정조의 행보는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새 시대의 막을 연 도쿠가와 이에아스를 연상시킨다. 울지 않는 뻐꾸기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이에야스처럼 본인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상업의 자유화인 신해통공과 신분제를 유연하게 해 인재를 등용한 것까지 정조의 업적은 이루 말하기 힘들다. 과묵하고 치밀한 성격인 정조도 때를 감내했다. 문무를 모두 갖추고 정치적 능력까지 탁월한 손에 꼽히는 군주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끌던 정조는 아쉽게도 49세의 나이로 서거하는데, 정조의 생이 10년만 길었어도 조선의 근대사는 빨랐을 것이라는 역사가들의 평가는 과언이 아니다.  




<작가가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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