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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지식in Oct 09. 2022

아이유 '드라마'와 시차 적응

노량진 언저리에서


나도 한때는 그의 손을 잡고
내가 온 세상 주인공이 된 듯

- 아이유 노래 '드라마' -



이른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꿈속에서 한창일 때 몇몇은 아침 이슬을 맞이하는 겁니다. 이불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새벽 6시, 서울과 경기도 일대 곳곳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하염없이 늘어져 있습니다. 길게 뻗어 나온 뱀의 몸통처럼 장사진을 이룹니다. 입가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몇몇은 허기를 때우기 위해 서서 김밥 한 줄을 꾸역꾸역 먹고 있습니다. 눈 빠지게 버스를 기다리며 다리를 동동 구르기도 하고, 잠이 덜 깬듯 연거푸 하품을 하며 졸린 눈을 비비는 대학생들도 보입니다. 공장을 가기 위해 새벽 4~5시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보다 시급이 높습니다. 하루 2교대의 공장일을 마치면, 그 자리에서 15만 원 상당의 일급이 바로 쥐어집니다. 빳빳한 5만 원짜리 몇 장으로 그날의 하루가 끝나는 겁니다. 일하는 정도에 따라 한 달에 기본 300만 원 이상을 받아 갈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많은 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막상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10시간 넘게 서서 쉬지 않고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서 부품을 조립해야 합니다. 몇 시간 일하다 도망치는 사람들도 수두룩한 곳인데, 하루 업무를 마치면 삭신부터 쑤십니다. 받는 돈 보다 나가는 병원비가 더 많을 수도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공장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넘쳐 납니다.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어놓습니다. 한때 잘 나갔지만 명예퇴직 이후 지갑이 얇아진 가장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한 푼 두 푼 돈을 모으는 소년 가장, 집 안에서 밥 달라고 조르는 자녀들을 위해 아득바득 일하는 이혼 여성까지 공장을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은 분주합니다. 노량진 수험가에서 같이 스터디했던 A양도 그렇게 공장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돈을 모아 이곳으로 오게 됐습니다.



■ '드라마' 역전 없어, 단조 이야기가 장조 노래로


텔레비전 속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는 것은 기적과도 같고, 하루아침에 인생 역전하는 로또 같은 스토리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삶의 무게를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거칠게 살아온 또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는 겁니다. 노량진에서 같이 스터디를 했던 A양의 사연도 그랬습니다. 공무원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습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짬짬이 영어단어를 외운 것은 기본이었고, 공장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면서 공무원 인터넷 강의도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푼푼이 모아 노량진에서 공부를 했고 떨어지면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는 메뚜기 생활을 이어 간 겁니다.


그녀가 일터로 가는 길에 들었던 노래가 아이유의 '드라마'였습니다. 경쾌한 노래음에 맞춰 따라 불렀다는데, 노래를 부를수록 무언가 복잡한 느낌이 들었다고 덧붙였습니다. 한때는 주인공인 것처럼 세상 모든 꽃송이들이 꽃잎까지 하나하나 피어났지만, 어느 순간부터 꽃들이 지며 조명이 꺼진 세트장에 혼자 있는 기분이라는 말을 담담하게 했습니다. 단조의 이야기를 장조의 노래로 경쾌하게 불렀다는 점, 인생사 새옹지마지만 꽃이  이후의 이야기가 2절에 묵직하게 다가왔다는 점, 노래를 부른 아이유 본인 역시 드라마 같은 가사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피부에 와닿았습니다.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 오늘도 시차 적응 중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생활 잘 모릅니다. 부모님이 매달 부쳐주는 용돈으로 돈 걱정 없이 학원비와 생활비를 썼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스터디를 같이 했던 A양과 또 누군가가 그랬을 겁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A양은 항상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다른 세계 시차에 적응하고 있었던 겁니다. 삶의 무게를 버티며 살아가는 A양을 보며, 거칠게 살아가고 있을 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가슴속에서 짠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삶을 되돌아봤습니다.


노량진 컵밥 거리만 봐도 그렇습니다. 3천 원짜리 컵밥 거리 앞에는 5천 원짜리 브랜드 커피 매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말 그대로 밥보다 비싼 커피입니다. 후줄근한 운동복을 걸친 수험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컵밥을 먹는 반대편에는 5천 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의 단면이기도 합니다. 몇십만 원이 없어 생을 마감한 '세 모녀 이야기'도 있지만, 하루아침에 수천만 원을 탕진한 사람들도 있듯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누군가 노동의 가치는 숭고하기에, 오늘도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 저공비행 하며 시차 적응을 하는 모든 분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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