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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지식in Dec 06. 2022

벽돌 한 장과 기울어진 달

노량진 언저리에서


며칠 전 어느 친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상기된 목소리로. 흥분된 목소리 사이로 백억 원이 넘는 정부 예산을 따냈다는 내용이 들렸습니다. 정부출연 연구소는 바늘구멍보다 들어가기 힘들다던데, 친구는 거기서 굵직굵직한 정부 예산들도 혼자서 척척 따내는 해결사였습니다. 여 보란 듯이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십여 년 전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느닷없이 휴대전화 메시지가 왔었죠. 급한일인데 200만 원을 빌려달라는 문자. 얼핏 보이스피싱처럼 보였지만, 문자 내용은 사뭇 진지했습니다. 당시 수습기자로 바쁘게 경찰서를 돌고 있던 상황이라, 문자를 읽고도 바로 넘겼습니다. 잠을 못 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서울에서 경기도 안산까지 급하게 택시를 타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친구와 소주를 마셨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블랙아웃이 된 것처럼 그날은 기억의 서랍 한편에 접혀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술집. 공격과 수비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말처럼, 이번에는 입장이 달랐습니다. 가는 곳마다 줄줄이 떨어지고 만신창이가 된 노량진 공시생과 바늘구멍을 뚫은 정출연 박사가 나란히 앉아있었습니다. 창밖의 기운 달처럼 술잔을 기울이며 친구는 그때 일을 끄집어냈습니다. 십여 년 전의 일로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깜깜한 방 안이 환하게 밝혀지듯 그때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접혀있던 기억들이 날개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소년 가장. 친구를 따라다니던 꼬리표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가장의 무거운 짐을 쓸쓸히 짊어지게 됐습니다. 중학생 때는 신문배달을 시작했고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습니다. 그때부터 하루에 4~5시간 이상 자본적이 없다는 친구. 대학생 때는 연구실에서 끼니를 해결하기 일쑤였고, 학식 메뉴는 줄줄이 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아끼며 어머니 용돈도 드리고 전셋집을 마련하던 찰나. 검게 드리워진 먹구름이 한줄기 촛불을 꺼버렸습니다.


카드 돌려막기 하던 친구 어머니께 사달이 난 겁니다. 독촉 고지서가 집안에 빼곡히 쌓였고, 빚 독촉 문자들이 빗발쳤습니다. 빨간딱지들이 집안 곳곳에 붙으며 전세금까지 위태위태했습니다. 말 그대로 집 밖으로 나앉게 생겼습니다. 친구는 급한 마음에 주변에 돈을 빌리러 다녔고, 버선발로 대학 교수님을 찾아갑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2천만 원을 빌렸습니다. 영화 같은 상상이 누군가에게는 현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번듯한 직장에 자기 이름의 아파트도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꼭 성공해야 한다고.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달라' 자신이 힘들었을 때 들었던 그 말들이 고마웠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다시 연락 온 친구가 저뿐이었다면서 그때 술자리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꼭 잘 되길 바란다'며 제게 말했습니다. 울컥하더군요. 십여 년 전 제가 했던 말들을 수년이 지나 똑같이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차오른 보름달이 어느 때보다 밝았더이다.



저는 마음속에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차곡차곡 쌓인 벽돌들이 마음의 벽이 됐죠. 세상을 향한 그리고 사람을 향한 벽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동굴 속에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숱하게 시험에 떨어지고 되는 일이 없을 때 저는 그 친구를 비롯한 주변 인간관계들을 정리했습니다. 핸드폰을 바꾸면서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했던 그 말들이 불현듯 다시 되돌아왔을 때,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걸 느꼈습니다. 스스로 되뇌던 말들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 친구의 말이죠. 마음속 벽돌들을 한 장씩 거둬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 자신에 대한 약속. 주변 사람들에 대한 용기. 두 가지 이유였습니다. 그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저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 보란 듯이요. 제 자신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다음은 용기입니다. 미안한 일을 사과하는데 용기가 필요하듯, 고마운 일에 감사를 전하는 것 역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뼈에 사무치듯 고맙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돌이켜보면 참 얄궂은 인생이지만, 달이 차고 기울던 그때를 앞으로도 기억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살고 있지만,
우리 중 몇몇은 별을 보고 있다.

- 오스카 와일드 -



<작가가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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