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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지식in Dec 08. 2022

[감상문] 스스로 눈 뜬 장님이 된 올빼미

닫혀있던 시야, 정통성 딜레마


뿌옇다. 무진의 안개처럼. 희끗희끗 보이는 손동작. 싸늘하다. 그림자가 드리우듯. 뾰족한 무언가 날아든다. 날카롭다. 송곳처럼. 침술이다. 예리한 바늘. 눈앞에서 멈춘다. 숨이 가쁘다. 땀이 난다. 손과 발에. 등 뒤가 서늘한. 상황을 살핀다. 정적. 낭자하다. 선혈이. 눈에서. 검은 피가. 아니 곳곳이. 매스껍다. 거북하다. 조여 온다. 숨통을. 무엇일까. 내 눈앞에. 멎는다. 파르르 떨던 몸이. 멈췄다. 처량한 나목처럼. 촛불이 꺼진다. 두 눈에 비친 주검. 눈을 뜬다. 마주한 진실과. 어둠 속 올빼미들.  


창궐한 역병처럼 음습한 분위기가 감돈다. 소현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돼 병을 얻었다. 학질. 말라리아였다. 뾰족한 침술이 피부를 관통한 후, 어둠의 그림자가 세자를 따라다닌다. 청나라에 볼모로 있던 생이별이 얄궂게 시간은 흐른다. 야속하게도. 아버지 두 눈에는 그런 어린 아들의 모습이 선한데, 현재는 과거가 됐다. 아비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랬을까. 알 수 없다. 조선왕조 실록은 세자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다고 서술한다. 누가 죽였을까. 아버지 인조라는 설이 있지만 물증은 없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 몰라야 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현세자의 눈이 아버지의 역린을 건드렸다. 인조는 수년 전 돌바닥에 머리를 세차게 들이받았다. 곳곳에는 선혈이 낭자했고, 꿇은 무릎 사이로 피가 응고됐다. 한이었다. 응어리진 한. 삼전도의 굴욕이다. 조아렸고 읊조렸다. 간곡하게. 오랑캐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그때 기억들이 머릿속을 지배하자 경련이 왔다. 숨통을 조여왔다. 진지한 표정으로 청나라 새로운 문물들을 이야기하던 세자 모습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목격자가 누구냐.



인조를 중심으로 침술사와 어의, 소용 조 씨와 강빈이 모여있다. 쇠를 깎은 듯 들려오는 소리. 날카로운 목소리에 침술사 경수는 화들짝 놀란다. 왕의 침실인 침전에 문이 닫히고,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취조하듯 묻는다. 아니 목격자가 누구냐고. 애초에 진실에는 관심 없는 듯. 가늘게 뜬 눈은 실눈처럼 시야가 점차 좁아진다. 강빈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심장을 쥐어짠다. 어의가 독살했다는 주장만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다.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인조. 광기에 찬 표정과 표독스러운 미소가 조선 왕실을 가득 채운다.



닫혀있던 임금 인조. 광해군을 몰아내고 용상에 오른 능양군은 죽을 때까지 정통성에 발목이 잡혔다.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을 터. 본인도 광해군처럼 언제든지 내쫓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무리수를 던지면서까지 아버지 원종을 왕으로 세웠고, 뒤틀린 권력의 욕망에서 정통성을 지닌 첫째 아들 소현세자에 컴플랙스를 품었다. 무수리(천민)의 아들인 연잉군(영조)이 사도를 죽였듯, 인조 역시 장자 소현세자를 가슴에 묻는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궁궐 밖을 봐도 그랬다. 친명배금. 임금이 찾던 정통성은 명나라였다. 성리학의 나라. 오랑캐 청나라는 아니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짓밟고 서민들을 볼모로 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사지로 몰았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이지만, 외고집으로 일관한 것이다. 풀 한 포기와 바람 한점에도 명나라 은혜가 스며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조. 정통성은 딜레마였다. 스스로 눈 뜬 장님이 됐다.


각설하고 조선은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충녕대군의 세종, 소현세자, 이산의 정조였다. 종합적인 관점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 꽃은 피었지만, 두 번째는 싹이 움트기도 전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조선은 또다시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눈과 귀를 닫으며 싹을 잘랐다. 시야가 좁고, 안목도 없던 올빼미는 침술사 경수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막아선 인조가 아니었을까.




<작가가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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