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최초의 한국인 추기경. 전 세계에서 가장 어린 47세 나이로 교황의 부름을 받은 인물. 향년 86세로 한 많은 인생을 누렸지만, 누구보다 따듯하게 그리고 거룩하게 세상을 보듬은 위인. 낮은 자세로 치열하게 인생을 고민한 김수환 추기경의 이야기입니다. 학창 시절 자신은 황국신민이 아니라고 써내 교장선생에게 따귀를 맞기도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학도병으로 끌려가 생사의 갈림길을 오갔습니다. 서슬 퍼런 군부 독재정권에서는 햇볕만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꼿꼿하게 냈습니다. 가시밭길을 몸소 걸어온 추기경은 두 눈을 감을 때까지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전했습니다.
화개살. 꽃을 덮어놓은 사주. 김수환 추기경을 설명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남자는 스님, 여자는 기생이나 비구니가 될 팔자라고 불립니다. 부귀영화를 덮으며, 고독하고 쓸쓸하다고 누군가는 전합니다. 인생에서 어떤 가치관으로 행동하느냐에 따라 꽃들이 그대로 사그라들 수도 있고, 반대로 화려하게 핀 꽃들이 세상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고민하고 사색하며 문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조예가 깊은 사주입니다. 소탈한 혜화동 할아버지로, 대한민국 민주화 대부로, 전 세계 가톨릭 거목으로 자신만의 십자가를 짊어진 추기경의 꽃들은 결국 수려한 향기를 남겼습니다.
[ 노량진 속 찬란한 화양연화 ]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화양연화입니다. 지금도 찬란한 시절을 노량진에서 보내는 청춘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남들과 다른 시차에 살고 있는 어느 수험생이 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12시간 공장일을 하고, 핸드폰을 조립하면서도 시간을 쪼개 인터넷 강의를 듣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쉬지 않고 서서 일하다 보면 어느새 녹초가 되어 있죠. 다리는 퉁퉁 불어 있고, 손에는 굳은살이 자리 잡았습니다. 눈물 없이 못 듣겠습니다. 막노동을 뛰면서 공무원을 준비하는 수험생부터,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는 경단여, 9회 말 2아웃의 중고 신입까지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넘칩니다.
아프니까 청춘일까요. 모르겠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공부를 하는 평범한 수험생들의 이야기만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면 노량진 속 화양연화도 꽃피울 겁니다. 행운을 뜻하는 연화의 꽃말처럼, 빗물의 짠맛과 소주의 단맛 같은 경험들은 인생의 피와 살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힘들고 외로운 동굴을 지나면 언젠가 아침이 오겠죠. 우리 모두는 시궁창 속에서 살아가지만, 몇몇은 별을 보고 있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지 않기 위해 마운드를 오르는 사람들을 응원합니다.
[ 못다 핀 꽃 한송이를 위하여 ]
화개살로 그리고 화양연화로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열병처럼 찾아온 31살 사춘기에 언론사를 떠났습니다. 사표라 쓰고 출사표라 읽었던 패기였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줄줄이 떨어졌고 취업시장의 종착역 노량진에서 찬란한 청춘을 보냈습니다. 타향살이 북녘땅에 공무원 둥지도 틀었지만, 낭떠러지 끝에는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스님이 될 팔자라고 누군가 그러더군요. 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라고 귀띔했습니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일 겁니다. 제 인생은 언제쯤 한송이 꽃이 필까요. 옛날을 추억하며 요즘도 노량진 컵밥을 먹으러 갑니다.
제가 당신에 대한 믿음은 없지만, 원칙은 지키며 살고 싶다고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은 명동성당.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때 배고픔과 간절함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줄한줄 써 내려간 글들이 출간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가지 않은 길이기에, 두렵고 설렙니다. 하지만 저의 작은 글쓰기가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울림으로 또 따스한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저와 당신과 우리 모두의 이야기. 못다 핀 꽃송이들을 위해앞으로도 글을 쓰겠습니다.래퍼 도끼가 두루마리 휴지에 가사를 쓴 것처럼, 독기로 풀어낸 첫 번째 믹스테이프 그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