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장발장. 빵을 훔친 죄로 5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고 수차례 탈옥하면서 19년의 시간이 빨간 줄로 지워졌다. 인생 낭떠러지에서 가난과 배고픔의 대가는 컸다. 장발장을 범죄자로 낙인찍은 무게는 고작 빵 한 조각이었다. 역설적으로 빵 한 조각은 누군가에게도 중요했다. 경찰 자베르. 공무원 조직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이다. 누구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누구는 가혹한 정의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 그깟 빵 한 조각에 말이다. 프랑스 어원인 빵은 영어로 'pain'이다. 먹고사는 일부터 신념과 정의를 지키는 일이 모두에게 중요하면서 고통으로 다가온 이유다.
"이 세상에 빈부격차가 남아있고, 가난 때문에 사람들이 삶의 밑바닥에서 허덕이고 빛이 닿지 못나는 곳에서 어린아이들이 위축돼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한 이 소설은 빛을 발할 것이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말은 사람들 가슴속에 새겨졌다. 소설 '레 미제라블(가련한 사람들)'은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했지만 지금까지 명작으로 손꼽히는 근거다.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뜨거운 울림이 있다. 정의를 위해 달려가는 자베르와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장발장.
법과 정의, 사랑과 인류애 그 언저리에서 오늘도 치열한 고민들을 사회에 던진다. '무엇이 정의일까' 학창 시절 읽었던 책이 요즘 무겁게 다가온다. 몇 달 전에도 사무실로 한통의 민원 전화가 걸려왔다.
"시장실 찾아갑니다" 금요일 저녁 퇴근을 10분 남긴 상황에서 민원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있었다. 고구마를 삼킨 듯 답답한 기분이 이어지는 가운데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분위기상 그렇게 하지 못했다. "주무관님, 공무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담담한 듯했지만, 한 옥타브 올라간 음성에서 화를 눌러 참는 듯했다.
"선생님 저는 법대로 했습니다. 문제 생기면 저도 사직서 들고 같이 시장실로 올라가겠다"라고 대답했다.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다 민원인은 전화를 끊었다.
'뚜뚜뚜' 끊어진 전화음 사이로 복잡한 심경이 몰려왔다. 주말을 앞둔 평온한 마음도 실타래처럼 엉켰다. 민원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수십만 원의 체납세금을 떠 앉게 됐다.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었다. 장남이라는 이유로 체납자로 몰리면서 집안 곳곳에 경매 딱지가 붙게 된 사연이다. 단돈 수십만 원에 빨간딱지로 낙인이 찍혔다.
법망의 사각지대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지자체는 법에 따라 상속을 가족들에게 알려준다. 재산을 살아있는 소유자와 연결하는 작업이다. 돌아가신 분들의 자녀들이 상속에 동의하면 재산과 세금이 모두 자녀들에게 넘어가지만, 동의하지 않을 때 상황이 복잡해진다. 가족 모두가 정해진 기한 내에 상속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게 걸려온 전화도 같은 상황이었다. 첫째로, 민원인은 정해진 기한을 따르지 않았다. 둘째로, 가족 모두가 상속을 포기하지 않았다. 때문에 민원인은 법에 따라 아버지의 체납된 세금을 떠 앉게 됐다.
비록 체납된 세금이 수십만 원에 지나지 않았지만, 민원인에게는 상황이 심각했다. 민원인은 꾸리던 사업의 부도로 다른 세금까지 있었는데, 세간살이가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었다. 소설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이 빵 한 조각에 범죄자로 낙인찍혔듯, 그 민원인 역시 수 십만 원 때문에 범법자가 될 상황이었다. 민원인이 일정 기한에 체납된 세금을 내지 않으면, 독촉을 거쳐 재산 압류를 당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자베르 경관처럼 냉혹한 정의를 부르짖고 있었다. 법조문에 따라 처리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시청은 입법기관이 아니다. 법에 따라 행정을 처리하는 기관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종이 한 장의 문턱효과다. 촘촘하게 얽힌 법망에 작은 물고기들이 걸리고 또 얼마의 돈에 누군가의 생사가 엇갈릴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법대로 했다고 끝내기에는 상황들이 간단하지 않았다. 실제로 지자체에서 상습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시민들은 우리 사회의 '레 미제라블'이 다수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건설 노동자들, 사연이 많은 동네 어르신들, 연고자 없이 떠도는 일꾼들이다.
금요일 저녁 시장실에 찾아가겠다던 그 민원인도 같은 처지였다. 빵 한 조각에 장발장이 됐던 것처럼 종이 한 장의 경계로 범법자로 낙인찍힐 상황이었다. 장발장으로 가는 '문턱효과'다. 문턱 높이까지 발을 들어 올려야 문지방을 넘어설 수 있듯, 일정한 경계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을 거다.
'정의란 무엇일까' 대답은 아직도 쉽지 않다. 하지만 법이 아는 사람들에게만 관대한 것은 분명하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까지 기득권층에게 법망은 열려있다.지역과 계층, 세대를 관통하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들은 세무사와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법망의 테두리 안에서 본인들의 권리를 지킨다. 법을 알고 미리 대응한다.
하지만 법망의 사각지대에 놓인 민원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분들은 법의 낭떠러지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뒤늦게 담당 공무원들을 탓 하지만, 공무원들도 관련 법 조문을 따르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만 열려있는 법망을 바꿀 수는 없을까.법(法)은 글자 그대로 '물 수'자에 '가다 거'자가 합쳐져 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게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민원인의 상황도 억울할 수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도, 본인이 첫째라는 현실도, 사업이 망한 제약도 무엇 하나 본인의 의지는 없었다. 외부에서 규정한 잣대대로 구속받게 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 잣대에는 사각지대가 있었다. 정의를 부르짖던 자베르 경관도 자신만의 원칙이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한 것처럼, 세상살이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