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로 현재 병무청에서 병역판정전담의사로 복무하고 있다. 의사는 치료를 목표로 진단, 처방, 술기 등의 의료행위를 하는데, 병역판정은 주로 이전 진단과정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신체급수를 판정한다. 판정 결과에 따라 수년간의 병역 형태가 좌우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관심이 많고 민감하기도 하다.
수련받으며 정신과 의사로 일할 때에 좋았던 것은 아픈 자의 편이라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어떤 가정에서 누구와 상호작용 하며 지냈는지, 그가 보인 행동은 무슨 의미였는지, 그중 병이 미친 영향을 무엇일지 고민하는 일이었다. 마음이 쓰이지 않던 환자일지라도 그 사람의 행동이 이해가 되어 그중 어떤 부분을 도와줄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타인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도움을 준다는 것이 좋았다. 정신과는 다른 과와 달리 수술을 통해 호전되지 않고, 수치로 보이는 영역이 적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이 일이 좋다고 생각했다.
처음 병무청에서 일하며 당황스러웠던 부분은 수검자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병역판정이라는 이차적 이득이 있는 경우 본인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심리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치료 의지, 동기가 약해지기 마련이다. 나라도 같은 입장이라면 그런 마음이 들 테니 무의식적인 영역까지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감별해야 할 부분은 의식적인 영역으로, 병역면탈이라고 부르는, 고의로 병역을 기파하려는 목적으로 질병을 지어내거나 과장하는 경우이다.
이 때문에 판정을 하면서 마음 한편에 의심하는 시선을 두고 수검자를 대하게 된다. 임상 증상과 심리검사 소견이 맞지 않거나, 처방받고 약을 복용하지 않아 혈중 약물농도가 낮은 경우, 이전의 치료 기록이 전혀 없다 입대를 앞두고 증상이 시작된 경우 등에서 더욱 꼼꼼히 판정하게 된다. 수검자가 어떻게 이 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한편,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습관을 들이기까지 적응의 기간이 필요했다.
처음 일을 시작하고는, 치료를 위해 필요한 마음의 자리를 잃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비슷하게 나중에도 지금처럼 의심하고 판정하려는 태도가 습관이 될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해하는 일과 판정하는 일 사이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고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