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원 Jul 15. 2020

부동산을 공부하며
상대적으로 불행해졌다.

  근무지 근처의 전셋집에서 가족과 함께 만족하며 살고 있었는데 최근 부동산 열풍에 휩쓸려 부동산에 눈을 뜨게 되며 상대적으로 불행해졌다. 불행은 욕심과 현실의 차이만큼의 크기였다. 지는 것을 싫어하고, 경쟁에 뛰어들게 되면 스스로의 욕심으로 인해 힘들어할 것을 예상해서인지 그동안 경제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지 않은 길을 생각하며 나는 왜 일반의 피부미용을 하지 않고 정신과에 오게 되었나 후회했다. 복무를 마치고서라도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문의로서의 알량한 내 자존심이 집을 사주지는 못하는데. 정신 치료를 통해 자신을 고통스럽게 이해하며 행복해지나 레이저 시술로 피부가 좋아져 행복해지나 행복의 크기를 누가 비교할 수 있나. 남들이 다 좋다는 것을 두고 나는 왜 고집을 피워 여기로 왔을까.  정신과를 선택했던 것이 당시엔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 같긴 한데. 혹시 어떤 결핍,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은 아니었을까. 부동산을 보면서는 돈이 많은 것이 세련된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지배했는데 그간 세련되지 못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특히 정신과는 세련과는 거리가 먼 듯 여겨졌다.


  학령기를 A시에서 지냈다. 강산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곳. 문화 편의시설이라 부를만한 것이 좀처럼 없어 청소년기 소설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지냈다. 할 것이 없으니 친구들과 대화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재수하며 서울에 가고, 다시 대학에 가면서 내 지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우스갯소리처럼 소비된다는 것을 알았다. 왜 다들 그렇게 생각하나. 난 아무래도 여기가 좋은데. 제주든 해외든 내가 여행하는 곳마다 내가 애정을 품은 장소가 모두 A시를 연상하게 한다는 것을 공형이 해석해줬는데 깜짝 놀랐다. 내가 정말 그곳을 좋아했구나. 단지 따분한 곳이라 생각해왔던 것 같은데. 무의식적으로 여행을 갈 때마다 비슷한 장소를 찾고 안정감을 느낄 정도로 내 마음이 컸다니. 그런데 부동산을 공부하면서는 A시에서, 물가인상률보다 한참 못 미친  아파트를 20년 이상 소유하고 있는 부모님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왔고 그중의 일부를 블로그에 올려왔다. 블로그에서의 내 정체성이 현실에서의 정체성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때도 있던 만큼 내게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함께 일하는 등선생한테 블로그를 알려주었는데 등선생이 지나가듯 왜 우울한 글을 주로 쓰냐고 물었다. 등선생은 친절하고 차분한 사람이라 당연히 비난하는 투는 아니었는데, 문득 이 나이에 가정도 있는데 아직도 감정조절 못하고 그런 글을 쓰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 블로그를 닫았다.


  비슷하게 고등학생 시절부터 나는 하루키를 가장 좋아해 왔다. 특히 장편소설을 좋아했는데 나는 반복해서 읽는 것을 좋아해서 어떤 책의 어떤 구절은 몇 번씩 필사를 하기도 했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물론 나를 포함해서, 단순히 좋아한다는 선을 넘어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왔는데 어느 순간 벗어나고 싶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엄마가 준비물을 챙겨주러 학교에 왔을 때 느끼는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하나. 비슷한 시기에 소설에 대한 매력도 잘 느끼지 못해서 차츰 멀어졌다. 


  하루키가 코로나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밝힌 의견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트럼프의 트위터 사용에 대해 '그런 문장으로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메시지를 발신하고 싶다.' 뭐야, 펀쿨섹좌처럼 말하는 건가?  반사적으로 비아냥거렸다. 일본에서 코로나 긴급사태 발령 시 라디오에서 음악을 선곡하며 '나는 성명 같은 것은 별로 신용하지 않는다. 감탄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길게, 강하게 남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음악은 논리를 넘는 것이며 공감시키는 능력이 크다. 소설도 마찬가지'를 읽고는, 너무 순진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묘하게 불편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기존의 내 모습에 대해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고 연속성을 유지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성장이라고 이해해서, 부동산을 공부하고 불행해하는 때에 스스로 다음 성장 과정으로 넘어간 듯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들이 잠들고 밤에 분리수거를 했다. 분리수거를 할 때 무의미한 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적적하니까 보통 음악을 듣는다. 비도 오는데 갑자기 오래전 듣던 노래가 떠올라 틀었는데, 의식적으로도 잘 생각나지 않던 20대 시기의 감정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이해됐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마음이라던지, 일기 속 내가 중요했던 시기라던지, 정신과를 선택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처럼 느꼈던 마음들이.


  이번 주부터 정신치료를 받기로 했다. 오래 머뭇거리다 결심했는데 샤워하면서도 상상 속 선생님의 질문에 자꾸 대답하곤 한다. 

작가의 이전글 이해하는 일과 판정하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