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의 일이다. 아이들이 어리니까 어린이대공원 동물원에 가고자 계획을 했는데 그날 일기예보에 비가 많이 온다고 했다. 갑작스럽게 다른 일정을 정하기도 어려워서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지 반쯤 체념하고 있었다. 아침에 이게 웬걸, 내가 사는 중부지방에는 비가 그다지 오지 않았다. 어린이대공원이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아서, 비가 오면 그냥 다시 돌아오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했다. 눈치게임에 성공했다. 주차장 한참 전부터 지금부터 주차장까지 2시간 걸린다는 팻말이 붙어있었는데 단번에 주차에 성공했다. 날씨도 선선하고, 이슬비가 오는데 그저 우비를 입고 보면 쾌적한 정도. 아이들도 동물을 좋아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왜 이렇게 오늘 운이 좋을까. 예상 밖의 선물을 만난 것 같아 너무 좋다며 한껏 기분 좋아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승하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집 안 창가에서 놀다가 창가의 방충망이 떨어지면서 승하도 집 밖으로 떨어졌다. 아이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높이는 1.7m 정도, 창밖 아래는 시멘트 바닥이었다. 나는 아래 마당에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달려와서 보니 승하 머리에 큰 혹이 있었다. 떨어진 높이를 보니 어른이라 해도 머리로 떨어졌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뇌출혈이면 어떻게 하나.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점점 졸려 하고 수차례 토를 했다. 의식 상태가 떨어지는 건 분명한 나쁜 신호인데. 다급한 마음에 알고 있던 신경외과 친구들, 응급실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우선 병원을 가서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냐고들 했다.
병원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필 비는 왜 그렇게 많이 오던지. 다행히 병원까지 가는 중 아이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아서 아주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생각은 했다. 다만 아주 오래전 학생 시절 배운 내용인데, 뇌출혈이 있고도 잠시 의식이 명료해지는 루시드 인터벌이 있다는 것이 괜히 생각이 또 나서, 마음을 아주 놓을 수는 없었다. 또 당장 생사가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뇌 손상으로 인한 이차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아내는 신경과 심리실에서 일하는데, 매일 신경과 환자들을 보다 보니 뇌 손상이 남을 수도 있는에 어떻게 하냐며 불안해했다. 듣던 내가 상상만으로도 너무 괴로워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별별 걱정이 다 들면서, 우선 생명에 지장이 없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픈 아이와 함께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면서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권역외상 센터였는데 중증외상에 해당한다며, 외상 협진을 봤다. 신경외과, 응급의학과, 외과 등 선생님이 모여 진찰하고 초음파도 봤다. 나는 과거 인턴 시절 응급실 근무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응급실의 일사불란함이 좋았다. 그것이 속 시원하고 쾌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빠른 분류와 처지, 환자 인계를 목적으로 한 응급실은 그 목적을 위해 설계된 어떤 거대한 우주선같이 느껴졌다. 정신과 관련된 질환들은 한 번에 뚝딱하고 해결되는 일이 좀처럼, 아니 거의 없지만. 응급실은 우선 환자를 분류하고, 처치하고, 해결되지 않는 경우 각 전문과에 인계하면 내 역할이 끝나게 되니 깔끔하다고 해야 하나. 그 장소가 그냥 좋았다. 내가 수련 받은 병원은 정신과 외래 앞에 응급실이 있었다. 친한 동기 형이 응급의학과에 근무해서 할 일이 없는 때에 종종 놀러 가기도 했다. 괜히 우리 과 환자 잘 부탁한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좋아했던 장소지만 보호자로서 병원에 방문하는 마음은 또 다르구나 싶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지만, 직장인으로서 병원에 근무하는 마음과 환자로 병원에 방문하는 마음은 꽤나 다르다. 매너리스틱하게 기계적으로 일하면 안 된다는데 인간이기 때문에 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종종 근무지에서 괜히 환자분 자리에 앉아보기도 하는데, 이번엔 마음이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역시 겪어봐야 알 일이다.
승하는 다행히 건강했다. 병원에서 뇌 시티도 촬영했고 별 이상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만 혈액검사상 걱정되는 수치가 있어서 입원해서 관찰하자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다행히 아주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처치는 아닌 것 같아 퇴원했다. 그러고는 평소대로 잘 지내고 있다. 밥도 잘 먹고, 여전히 두 살답게 떼 부리는 것도 잘한다. 그날 동물원 갔던 이야기도 창문에서 떨어진 이야기도 하는 걸로 봐서 기억상실도 없었지 싶다.
아이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사실 그런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초조하게 보내는 시간 동안,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지금도 문득문득 놀란다. 만약 그때 혹시라도 사고가 더 컸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 어제는 손톱깎이를 찾으려 서랍을 열었다 승하의 사진이 나오는데, 만약 이것이 더 큰 사고의 이후였다면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날 함께 놀던 주호도 깜짝 놀라서 주호는 병원에 간 우리들을 기다리며 외할머니와 기도를 했다고 한다. 주호는 신이 뭔지도 누구인지도 모른다. 다만 혹시나 도와줄 수 있으면 동생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맨날 싸우고 그래서 미운도 동생이지만, 그때엔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나 보다. 어쩌면 그 기도가 어딘가 닿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 천만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