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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Sep 13. 2023

개원을 준비하면서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계기는 이상하게도, 타인의 좋은 글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글을 읽고 그 글이 참 좋다 하고 멈췄으면 좋았을 것을. 어떻게 된 마음이었는지, 내 한계는 여기까지구나, 나는 능력이 안되는구나 하고 쉽게 납득해버렸다. 나는 그동안 내가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미련이 있는 사람처럼 그저 매달리고 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은 내가 소화한 것을 내 언어로 담백하게 쓴다고 생각해왔는데, 꼭 그것이 심심하고 부족한 듯 느껴졌다. 안 좋은 생각이 드는 때에 매달려봐야 부정적인 생각만 계속 이어질 것 같아서 그냥 차라리 내버려 두고 있었다. 가만히 시간이 지나고 보면 또 다르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나의 어떤 기복, 그것이 감정이든, 기분이든 하는 것을 날씨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장마가 이어지는 동안엔 야외활동을 자제하는 것처럼, 좋지 않은 기분이 유지되면 잠시 멈추는 것도 좋지 않나. 어떤 때엔 화가 난다. 남들은 다 따사로운 일 년을 보내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비가 자주 오지? 나중에는 또 받아들인다. 아 나는 일종의 열대기후인가. 그래서 나한테는 건기도 있고 우기도 있고 스콜도 때때로 오는 것이 아닐까. 열대 기후에는 열대 기후에 맞는 식물들이 자라고, 그건 그대로 또 좋지 않나. 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낫다.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진료가 있지만, 내가 원하는 형태의 진료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개원을 결심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예약을 하고, 시간을 분배하고 진료를 꾸려나가고 싶었다. 내가 말하기보다 듣는 진료를 하고 싶었다. 가만히 기다리다 보면 어느 때에 말로 표현되는 순간이 있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마음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 꼭 누구랑 차를 타고 함께 가는데, 누군가 문득 자신의 이야기를 해서, 창밖 풍경을 보며 그 이야기를 하염없이 듣게 되는 때처럼. 나는 다행히 듣는 것을 비교적 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내게는 그것이 맞는다고 생각되었다.


개원 준비는 꽤나 힘이 드는 일인데, 그래도 좋은 일들이 있다. 공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다는 것. 내 머릿속의 상상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공간으로 구현하는 일이 재미있다. 이 공간을 어떻게 꾸밀지, 어떤 음악이 어디서 어떻게 흘러나오면 좋겠는지.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분위기는 어떤 것인지. 그러한 것들을 상상한다. 지금의 내게 중요한 것은, 93.1이 조용히 흘러나오는 대기실, 차음이 잘 되는 안전한 진료실, 그리고 편안한 리클라이너 소파인데. 내 방이 분석가의 방과 비슷하면 좋겠다고 바라기 때문일 테다. 또 다른 건, 장소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높은 천장과,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대기실인데. 뭔가 탁 트인 쾌적한 인상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 개원 예정지를 듣고 강남 한복판이라고, 다들 격전지에 뛰어든다고 걱정을 한다. 나도 마음이 상당히 불안해서, 그 부족을 가능하다면 돈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빚으로 메우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화려한 인테리어, 화려한 오디오, 화려한 가구 같은 것들. 그런 것이 없으면 혹시 좀 후진 병원으로 보이면 어쩌나 그런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런 불안감이 드는 때마다 병원 이름을 떠올린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꼭 부적을 지닌 사람처럼. 나는 최고의 정신과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정신과를 하고 싶은 것이라고. 내 불안감에 자꾸 소비를 키우는 꼴이니 자제하자고. 생각한다.


요즘의 사소한 고민 중 하나로, 진료실에 어떤 사진을 액자로 걸까 고르고 있다. 지금까지 찍어왔던 사진들을 훑어보다 빛이 예쁜, 나무를 찍은 사진으로 두 장 골랐다. 사진을 찍었을 당시엔 눈에 크게 들어오지 않았던 사진이었는데 개원을 준비하면서는 자꾸 눈에 밟힌다. 빛이 아름답게 든 사소한 풍경이란 점이 마음에 든다. 평소엔 당연히 지나칠 수밖에 없는 풍경인데 정말 자세하게 보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그런 장면들. 꼭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인 것 같다고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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