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어떤 구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이해받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글로. 신형철의 어떤 책의 프롤로그였던 것 같다. 그것이 최근에 떠오른 것은, 홈페이지에 들어갈 문구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인데, 그 글을 다시 읽으면 연상이 이어지면서 내가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타인의 글을 빌려서라도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는 개원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러니 책을 찾아서 내가 기억하고 있던 구절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미루고 미루다 기억하고 있는 구절을 찾아보고자 책을 찾아보는데,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프롤로그가 아니었다. 그러면 몰락의 에티카였는지. 그래서 몰락의 에티카를 찾아보는데 그 글도 아니길래 꽤나 당황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어떤 사람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왜 중요한지,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면 왜 슬픈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학문적인 노력이 어떤 것이 있는지. 그중 정신분석의 역할을 무엇인지에 대한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기억에 뭔가 왜곡이 있는 모양이다. 오랫동안 알아보다 내가 찾은 글이 내가 찾던 글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살면서 종종 착각을 하는데 어떤 날엔 이게 꿈이었나 현실이었나 구분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있으니... 내 기억이 맞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결국 정신분석, 정신치료를 하겠다고 강남구청역에 개원하게 되다니. 근 1년간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전공의시절부터 정신치료를 좋아했지만, 일반 진료를 하면서 일부의 시간을 떼어 정신치료를 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병무청 복무하면서 심층반 과정을 거쳐 분석학회에 가입했고, 그 과정에서 정신치료도 받게 되었던 것이 결국 이렇게 흘러오게 된 것 같다. 아마 내년에 분석가 과정이 열리면 지원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으로서 내겐, 그것이 내게 절실한 것이면서 또 내 유일한 무기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다. 나는 조심스러운 결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내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 같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병무청 시절부터 받기 시작한 주 2회의 정신치료는 벌써 만 3년이 넘었다. 물론 치료 세팅과도 관계가 있겠지만, 3년의 기간 동안 명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으니 열심히 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처음 시작하면서는 나 자신에 대한 답답함이나 궁금증도 있었지만, 또 다른 마음으론, 정신과는 내가 환자를 대하는 일이니. 내가 정신치료를 받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직업적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던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던 많은 어려움 중 한 가지는 공격성이다. 평소에는 잘 숨기고 있고, 좋게 보자면 그것이 적극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화가 많이 나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 위험하고 느낀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떤 경우에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꼭 내 마음의 맹점처럼 작용해서 나는 어떤 때엔 나뿐만이 아닌 타인이 화가 났다는 것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했다. 아마 공격성과 관련된 주제들이 내게는 너무 버거웠던 것 같다.
정신치료를 받기 시작한 첫 해에 내가 총기난사 사건을 계획하는 범인이 된 꿈을 꾸었다. 내 가방 안에는 무고한 학생들을 살상하고자 하는 각종 폭탄과 클레이모어가 들어있었다. 꿈에서 범행 동기는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어떻게 그것을 잘 터트리나 하는 것이 내게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 비밀스럽게 범행을 준비하고 있는데, 내 모교의 교수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아마 그 교수님은 내가 불안정해 보이니 잘 설득해 보라는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내게 어떤 일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꿈에서의 나는 이제 와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내용이었는데.
정신치료의 과정은 내가 소화하지 못하는 것을 분석가의 도움을 받아 소화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치료에는 시간과 비용이 아무 많이 들었지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내 이야기를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는 경험을 하며 존중받는다고 느꼈던 것 같다. 처음엔 치료가 너무 오래 걸리고 또 너무 느리게 진행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어떤 일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진료 중, 자존감은 어떻게 올리는지 여쭤보는 경우가 있다. 지금까지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원인을 찾다 보니 그 모든 것이 낮은 자존감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지 여쭤보신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그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는 방법을 알려드리기보다, 그 좌절감을 함께 공감하는 것이 내가 치료자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