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리에서 사랑을

by 이재원



대기실에 틀어놓을 플레이리스트를 고르는 일은, 화분을 가꾸는 일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하게 되는 일이다. 내가 듣고 싶은 음악만을 마냥 틀어놓을 수는 없고, 개원한 지도 벌써 일 년 반쯤 되어가다 보니 몇 가지 기준이 생겼다. 되도록이면 고주파 음이 선명하지 않은 음악이 좋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이나 색소폰 같은 악기는 방음문을 넘어 진료실까지 흘러들어와 진료 중에 신경이 쓰인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 중에서도, 너무 신나거나 너무 쳐지지 않는 음악이 좋다. 적당한 음량으로 틀어두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음악이 필요한데, 은근히 고르는 일이 쉽지 않다.

한 번은 진료 초기에 별생각 없이 클래식 FM을 틀어두었는데, 토요일 오전이었던 것 같다. 피아졸라의 불안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침 검사실에서 검사를 받고 계시던 환자 한 분께서, “안 그래도 심란해서 병원에 왔는데, 이렇게 복잡한 음악을 틀어두시면 더 괴롭다”고 하셨다. 얼마나 죄송하던지. 그 이후로는 좀 더 거슬리지 않는 음악을 고르기 위해 신경을 쓰고 있다. 오후 즈음의 ‘명연주 명음반’ 시리즈도 때로는 연주에 지나치게 심취한 음반들이 있어, 조용히 틀어두기엔 어울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내가 미리 만들어둔 플레이리스트나 클래식 FM 중에서, 스테이션 선생님께서 적절히 골라 트시는 듯하다.

이런 기준들을 적용하다 보면 자주 손이 가는 음반들이 생긴다. 요즘 병원에서 자주 들리는 음악은 Kings of Convenience, Luiz Bonfá, 그리고 Duke Jordan이다. 고등학생 시절, 듀크 조던의 《Eternal Travelers》라는 앨범을 서울 나들이길에 큰마음을 먹고 구매했던 기억이 있다. 오랜만에 운전하면서 그 앨범을 다시 들었고, 그 시절의 몇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From Russia with Love라는 트랙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CD로 음악을 듣던 시절, 학생 신분으로는 음반을 자주 살 수 없었기에, 하나를 사면 한 달 내내 낮이고 밤이고 반복해 들었다. 한 달 동안 그 음반을 배경 삼아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러시아에서 사랑을 보낸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듀크 조던 하면 떠오르는, 눈이 내리는 앨범 표지도 러시아의 설경이라 괜히 상상해보았다. 그때 나는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마음 깊이 좋아했다. 그러면 또 그 러시아의 눈 내리는 풍경이, 깊은 산속 눈이 펄펄 내리는 ‘도망친 마가리’로 변하고, 러시아 마가리에서는 이런 마음이 들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뭔가 조용하고, 뽕짝처럼 끈적한데, 마음엔 착 달라붙는.

언젠가 유럽에 가면 직접 연주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던 적도 있었는데, 내가 조금씩 나이를 먹는 사이, 2006년에 듀크 조던은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나중에 다시 들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음악이, 이제는 더 이상 연주될 수 없는 음악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감정은 조금 달랐다. 물론 듀크 조던이 살아 있었다 해도, 내가 덴마크든 프랑스든 그 음악을 들으러 직접 가지는 않았겠지만, ‘언젠가’라는 기대가 있다는 것과, 그 기대가 완전히 닫히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From Russia with Love가 007 영화 「위기일발」의 원제이며 그 주제가라는 사실은 훨씬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백석과 숀 코너리의 007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서, 일부러 그 영화를 찾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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