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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Sep 26. 2021

유튜브 시대의 자아성찰

 요즘 유튜브로 한문철 티비를 자주 본다. 한번 보고 나니 계속 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교통사고를 다루고 있으니 긴장되는데 나는 안전한 곳에서 보고 있으니 위험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마침 내가 아는 길이라도 나오면 현장감이 더해져 호들갑을 떨게 된다. 아이 저러면 안 되지, 이건 제보자의 과실이 더 크겠다. 마치 축구 경기를 보는 사람처럼 훈수 두게 된다.


 콘텐츠 자체도 흥미로운데, 교훈 적이기도 하다. 사고 영상을 보면 세상엔 예측할 수 없고 또 대응하기도 어려운 사고가 참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나의 평온한 일상생활에도 갑작스럽게 사고가 찾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혹시 나한테 저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나는  사고 이후 일상으로 쉽게 돌아올 수 있을까. 저 많은 사고를 겪은 사람들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해결하는 걸까. 운전하면서도 한층 경계의 정도가 올라가서 방어 운전하게 된다. 법률적 지식까지 얻을 수 있으니 여러모로 유익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이런 걱정도 든다. 혹시 한문철 변호사는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늘 분쟁의 한가운데서 서로 내가 잘했네 네가 더 잘못했네 주장하고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있는 것이 지치지는 않을까. 사고 당사자들은 자신이 가해자든 피해자든 모두 자신의 합리성과 타인의 과실을 주장한다. 내가 그것을 매일 듣는 입장이라면, 사람을 믿는 것이 좀 더 어려워질 것 같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는데 뭐가 맞고 뭐가 틀린 걸까. 나와 가까운 친한 사람이라고 다를까. 나라면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상대를 비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과실을, 책임을 안을 수 있을까. 댓글도 대부분 날이 서있고 화가 나서 과실이 큰 편을 비난한다. 그런 일을 매일 중재하는 삶은 어떨까. 한문철 변호사는 종종 제보자의 편을 더 든다는 비판을 받는다던데. 물론 사건에 대한 정확한 해석 혹은 판결도 중요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나와 가까운 사람 편을 들어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 같기도 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을 때 동기들의 반응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혼자서 공부하는 것이 차라리 속이 편하다는 반응과 병원에서 일하는 것이 공부보다는 낫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후자로 병원에서 일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매일 책을 보고 시험을 보고 동기들과 경쟁하는 일은 지쳐서 자신을 갉아먹는 것만 같았는데 병원에서의 일은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인턴으로 일하던 때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40대 남자분으로 허리 수술 이후 입원 중이셨는데 변비가 악화되었다. 일상생활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따라 장도 배 안에서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허리 수술로 인해 움직임이 제한되어 침대에만 누워계시니 변비가 점점 악화되셨나 보다. 일반적으로 병동에서 변비가 악화되면 약을 사용하고, 그래도 안되면 글리세린이라는 미끌미끌한 액체를 이용해서 관장을 시도하는데 그럼에도 해결이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병동에서 오는 콜을 받고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는데 일반적인 글리세린을 이용한 관장이 아닌 디지탈 에네마를 하라고 했다. 디지탈? 내가 모르는 새로운 장비를 사용하는 건가. 처음 듣는 술기라서 그게 뭐냐고 되물었더니 손가락(digit)을 이용해서 직장 안의 굳은 변을 꺼내라는 답변을 들었다.


 비위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내게 주어진 일을 거부하거나 미룰 수는 없었다. 처음 해보는 술기이니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아 미리 방법을 익혀두고 병동으로 갔다. 라텍스 장갑을 몇 겹을 끼고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굳은 변을 꺼냈다. 환자 아저씨는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변비로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민망하셨는지 어색함을 견디기 위한 대화를 나눴다. 일이 끝나고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씀하셨는데, 괜히 나도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도왔다는데 마음이 움직여 언제든지 또 힘든 상황이 생기면 병동에 말씀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이 다행히도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이라는 데에 안도하기도 하고 만족스러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정신과에 와서 그것이 구원 환상(rescue fantasy)의 일부일 수 있다고 들었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으로 내가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다면 그것이 이타적 행동이 아니라 내 마음의 구멍을 메우기 위한 행동일 수 있다고 했다. 채워지지 않는 나의 마음을 일에 몰두하며 채울 수 있다고 다행스러워했는데 그게 건강한 방식이 아니라니.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엔 내가 안전하다고 믿었던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그냥 적당히 스스로의 역할에 취해 만족하며 지내면 안 됐던 것인지. 차라리 몰랐다면 적당히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알게 된 것을 괴로워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요즘은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그래도 모르는 채 사는 것보다는 알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의 일이 대부분 타인을 돕는 편이란 점은 다행이지만 그 역할이 나 자신인 것은 또 아닌 것 같다. 나는 종종 남을 미워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정신과 의사라고 남들과 다른 성숙한 인격을 지닌 것도 아니다. 직업상 내 모습을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뭔가 거짓으로 사는 것 같다. 나는 환자의 삶에 의문을 갖고 묻고 듣고 쓸데없는 말을 적게 할 뿐이다. 대개의 경우 환자가 내게 바라는 것을 내가 충족시켜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까지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알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개인 블로그를 오랫동안 운영해왔다. 모두 삶의 방식도 성격도 달라서 블로그는 종류가 여럿인데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블로그들이 좋다. 한 때는 내가 스스로 미숙한 나 자신의 마음을 잘 처리하지 못해 글을 쓰는 것인가 스스로 의심하기도 했다만, 지금은 그저 이 자체가 내 모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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