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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mianK Oct 20. 2020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 사상

그와 니체에 대하여.. 책을 펴기 전 알아두면 좋을 간략한 니체의 사상.


인간의 존재는 한없이 가벼운
인간의 역사또한 깃털처럼 가벼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그런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쿤데라>


[니체를 사랑했던 밀란 쿤데라. 그에 대하여]

  나는 5년 전 어느 날 인문학과 서양 철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선 내가 철학적 통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매우 단순했다. 나는 스스로 지적 호기심이 다분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느 날 4대 성인에 대해 궁금해서 위키를 찾아보게 되었다.

 4대 성인은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 예수인데 철학자와 종교인 각 두 명씩이다. 나는 당연하게도 인간의 과학발전과 일반 학문의 발달, 인간 정신 정립의 뿌리는 철학과 종교의 그 발전과정 속에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그리하여 나는 철학과 종교 동시에 관통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의 사랑 또한 그 속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그때부터 인간 정신의 특성과 인문학의 발달이 어떻게 발전하고 쌓아올 수 있었는지 매우 궁금해졌다. 철학과 종교에서 인간 정신을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지식을 좇기 시작했다.

4대성인 그들이 매우 비슷한 시기(기원전 6세기~기원전 4세기경)에 탄생하고 소멸한 것을 보면 그 시절 왜 인간 정신발달의 최절정기였는지 알만 했다. 이로써 나는 60여 명의 철학자들을 연대기별로 나열하여 각자 가지고 있는 성향별로 간단히 구분하고, 고대철학-중세 암흑기-르네상스-근대-현대의 순으로 철학과 정치 경제 사회의 발전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경제학 서적이든, 정치학이든, 심리학이든 모든 종류의 지식 속에 철학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나의 철학이 아닌 남의 철학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런 지식 속에서 큰 줄기의 통찰을 알게 된다면, 이 것을 내 인생의 지혜의 씨앗으로 심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가 일반 대중과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굳게 믿는 개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나 또한 교육시스템이라는 인큐베이팅을 거친 한 명의 평범한 대중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이때 알게 되었다. 자본주의라는 흐름 속에서 내가 어디에 표류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된 어쩌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발견한 단 한 가지는 인간의 허상에 대한 상상과 창조력에 대한 것이다. 인간 상상력의 원동은 비판과 의심에서 시작한다. 상상과 상상의 대립 속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방향의 정반합이다. 2만 년 전의 동굴벽화들이나, 사자머리가 달린 남성 목각 등은 세상에 없는 관념의 창조물이다. 실제로 날개 달린 인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 - 론강 별이 빛나는 밤

“우리는 왜 음악을 사랑하고, 밤하늘의 달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마도 음악과 달빛 모두 우리의 밤을 아름답게 비춰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마음에 찾아오는 수많은 어둠의 밤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수 천년 전 다양한 문화를 창조하며 생활한 다문화 유인원들은 수천만 개의 다문화국가로 살고 있었지만, 이제는 권력과 무기 또는 균에 의해 모두 죽거나 학살 또는 식민지화되어 고작 몇 개의 커다란 문화와 정신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만을 좇거나 믿고 폭력을 거부한 인류 민족은 대부분 남아있지 않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양적 ‘선’함 그것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이다.


  주로 동양에서의 ‘선’함은 도덕적인 것, 인내, 절제, 관용 등을 먼저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서양에서의 ‘선’함은 탁월함(Excellence)을 기반으로 한다. 이 탁월함이라는 것은 목적을 베이스로 한다. 그리고 탁월함(선함)이라는 것 자체가 모든 개인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라 믿는다.

  이는 엘리트주의적 관념을 시작으로 본래 인간은 신에게 선택되었고 창조되었으며, 진리는 존재한다는 종교 발전에서부터 훨씬 더 강하고 오랫동안 뿌리 깊게 유지되었다. 고대 이집트 시기 이전부터 만들어져 내려온 계급 문화의 뿌리의 뿌리는 그 근간을 훨씬 더 강하고 견고하게 조직하고 있다. 우리는 비판할 새도 없이 내려온 역사의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으며 성장한다.





[작가 소개 : 밀란 쿤데라] (1891~1971년 : 91세 생 마감)

  밀란 쿤데라는 체코슬로바키아 브륀 태생의 소설가이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체코가 소련군에 점령당한 후 시민권을 박탈 당해,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이후 1989년 체코 민주화 이후 본국으로 임시 귀국하였다.


  그는 상당히 기품 있는 집안에서 루드빅 쿤데라(1891년~1971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체코의 주요한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리고 1948년에서 1961년 사이에는 브르노 뮤지컬 아카데미의 수장이었다.


  이러한 음악적 배경은 그의 작품의 근간이 된다. 심지어 그는 악상 기호를 텍스트 속에 그려 넣기도 했다.

쿤데라는 민주주의의 체코 슬로바크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 속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젊은이의 사상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쿤데라는 1968년 체코의 예술가이자 작가인 바츨라프 하벨과 함께 프라하의 봄(반공산주의)에 참여하였다가 추방되기도 한다.


  프라하의 봄(반공산주의)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간섭하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기를 말한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정치인, 지식인, 예술가, 학생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 자유화 운동이다. 이 시기는 1968년 1월 알렉산데르 두브체크가 집권하면서 시작되었으며, 8월 소비에트 연방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개혁을 중단시키면서 막을 내렸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페스티벌’은 1968년 이 날에서 유래된 것이다. 1989년 소련의 멸망과 함께 프라하가 민주화되면서 이후 1990년 열린 음악축제가 민주화 이후 첫 음악축제가 되었다. 이때 지휘자 라파엘 쿠벨리크는 국민들 앞에서 다시 되찾은 조국의 감격에 눈물을 흘리며 <나의 조국>을 연주했다.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의 비폭력 평화시위(광화문의 촛불 시위가 떠오른다)



  1984년, 그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개인의 운명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그리고 있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사는 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반복과 경험, 시험과 실패의 가능성조차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체코에서 쿤데라가 집필한 마지막 작품인 이 소설은, 그의 어떤 작품보다 세계주의적이며, 철학적(조금 정치적이기도 하다)이다. 니체의 사상은 멋지지만 그 조차도 회의주의 때문에 괴로워했음이 작품에 잘 드러날 것이다.

쿤데라 소설의 스타일은 철학적 여담의 얽힘이자,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과 니체의 산문, 그리고 카프카와 하이데거와 같은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쿤데라의 소설적 기법은 알랭 드 보통이나 아담 더웰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차용되었다.


 이 작품에는 유독 니체에 대한 언급이 많다. 니체와 밀란쿤데라가 비슷한 시기에 나고 죽었다는 것 또한 작품에 니체에 대한 공감이 많이 묻어나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1844-1900 57세 사망)

[니체의 사상의 핵심을 짤막하게나마 정리해보았다]

  책의 서문부터 밀란쿤데라가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을 강조하는 것은 이 책을 접하기 전 니체의 사상을 짤막하게나마 정리할만한 명목을 제공해 주었다. 나는 이전부터 니체의 사상에 관심이 많았지만 자세히 정리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을 벗어나므로 간단히 요약하는걸로 마무리 하려 한다.


[주인과 노예의 도덕 <도덕의계보-니체>]

  일반적인 대중은 책을 두려워한다. 지식을 가진 자를 두려워한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어리석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시샘한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개척할 거라 말하며 안전을 보장받길 원한다. 자신의 삶을 위로받고 싶어 한다. 대중과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언제나 안정을 추구하며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서 독립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교육이라는 시스템으로 인큐베이팅되며 대중으로 길러내 진다.

  이는 5천 년 전의 이집트 노예들이며 또한 근로자로서 살아가는 우리이다.

 자본주의는 이들에게 빚이라는 무게를 더 얹어주고 그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맨다. 진실은 언제나 우리를 불편한 공감으로 이끈다.


 지식과 역사를 공부하지 않고서는 내가 표류하는 바다가 어디로 흐르는 건지 정체한 건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인간 또한 우주의 큰 틀의 의미에서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종이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절묘하게 떼 지어 다니는 열대어와 벌떼, 보고 있으면 놀라운 시스템의 체계 속에서 움직이는 개미떼들과 다름이 없다고 본다. 굳이 계급을 두자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하는 이들은 체계적으로 길러내어 지는 감마나 입실론 계급이다.


  이에 반해 어떠한 이들은 책을 사랑하고 자연과 꽃을 좋아하며, 지혜와 지식 속에서 더 넓은 관념의 확장을 시도하며 세상을 바라보려는 자들이 있다. 살인과 폭력 그리고 악이 난무하는 세상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로 맞선다.


  선함을 찬양하지만 악 또한 긍정하며 대중이 바라보는 반대편을 인정하여 그 사이에서 독립된 자신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법과 도덕은 더 이상 지켜야 할 무엇이 아니다.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된다. 이들은 죽음 또한 불사할 용기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차근차근 자신의 힘과 권력을 쌓아간다. 그들은 법과 사회시스템을 개정하기도 하고 자신의 정신을 전파하여 세력을 확장해가기도 한다.


  선과 악, 폭력과 저항, 삶과 죽음, 이상과 현실이라는 상반된 생각을 품고도 그 사이의 경계 속에서 정상적으로 사고한다.

  이들은 대중의 이데올로기로 잘 훈련된 일반 대중인 유인원의 정신적 유연함을 활용한다. 시스템을 만들거나 문화를 창조하며 법과 제도를 개선한다. 현금의 파이프라인을 창조하며 그 속에서 일할 사람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정신을 전파한다. 그들에게 이러한 지성에 대한 욕심과 창조적 파괴는 그들의 숙명이며 큰 기쁨이 된다.

올더스 헉슬리가 말하는 이들은 알파 계급이 될 수 있다. 알파나 입실론이나 모두 죽어 없어진다. 존재의 가벼움을 인정하고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는 것에서 철학한다. 결국에 철학은 죽음을 절대로 초월하지 못한다. 좋은 죽음을 알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에.


"최고의 지성은 두 개의 상반된 생각을 품고도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는 것이다.

- 피츠제럴드"


니체는 이러한 관념을 ‘도덕의 계보’에서 주종의 사랑으로 설명한다.

인간이 가진 놀라운 능력인 상상과 공감, 그리고 창조라는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멈추어 생각해본다면 이제 절묘하게 떼 지어 다니는 나의 표류를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영원회귀 : Amor Fati]

  우리는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몸소 겪어본 작가들의 존재에 대한 철학은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밀란 쿤데라가 전쟁터 속에서 죽는 대중들과 각자의 개인이 가지는 자유의지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개개인이 존재와 자유의지가 얼마나 가볍게 희생 수 있는 것인지 작가는 말한다.


  원래 인생에 의미는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영원히 인생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유쾌하고 즐겁게 후회 없이 늘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살아가라고 강조한다. 원래 인간의 존재는 가벼운 것이라고 말이다.

이 말은 곧 인간의 경험과 감각을 긍정하는 것이 되고 오늘 하루만 존재한다 하더라도 늘 가볍고 유쾌하게 살아가라는 말이 된다.


헤르만 헤세 또한 니체를 사랑하였는데 그의 작품 <데미안>에서 카인과 아벨의 예시를 인용해본다.

“난 카인이 엄청난 사람이었고, 사람들이 그가 두려워서 그를 탓하는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생각해. 카인 이야기는 사람들이 가볍게 떠들어대는 터무니없는 소문에 불과한 거지. 그런데 카인과 그 자손들이 표식을 지녔고 남들과 전혀 달랐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생각해. – 데미안

 이 말을 들은 싱클레어는 놀라서 도망간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카인은 아벨을 죽인 살인자인데 어떻게 저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


  데미안이 말하고자 한 것은 영웅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폴레옹, 율리우스 등의 영웅들의 표식을 이야기 함으로써 그는 선함만을 좇을 것이 아니라 악함 또한 긍정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이로써 인간 존재의 가벼움이 설명된다.


  하지만 종종 이러한 회의주의적 사상에 대한 전문가들의 비판도 존재한다. 그의 사상은 자신의 길을 강하게 믿고 개척하려는 힘에의 의지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테면 권력과 힘을 탐하고 다양성을 배제하는 전체주의적 사상인 나치즘이 그러하다. 아무리 인간 존재가 가볍다 하더라도 유대인 학살을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그래서 그의 사상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며 인본주의 유지를 위해서는 사상의 전파는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무엇이 맞다기보다 언제나 권력의 이데올로기의 정반합적 양쪽 대립으로써 생겨나는 새로운 방향이 바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데올로기 또한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간다.


  어쨌거나 나는 여기에서 1차 대전의 프라하를 배경으로 써 내려간 이 작품 또한 “영원회귀”라는 신비한 사상을 잘 표현해낸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가볍고 불안한 인간은 자연스럽게도 무겁고 영원한 것을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관계로써 무거워지고, 죽음으로써 다시 가벼워진다.


[위버 맨쉬. 신은 죽었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Amor Fati) 받아들여 계속해서 성장해야 함을 강조했다. 헤르만 헤세 또한 니체를 사랑하였는데 그의 작품 속 데미안은 우리의 내면이다. 내면에서 다시 외부세계의 운명에 맞서 끊임없이 권력에 대해 투쟁하고 쟁취하여 행운의 여신을 불러오는 용기 있는 젊은이가 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사상 또한 회의주의라는 한계점이 있었다. 어쩌면 인간 중심의 사상인 인본주의 맞은편에서 말이다. 인본주의 바깥에 있는 모든 생명체, 즉 인간을 제외한 수많은 생명에는 아무런 도덕과 윤리를 부여받지 못한다.

인본주의란 인간 중심적 사상을 의미한다. 인간이 최우선이고 다른 모든 가치는 그 이후에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말을 조금 인용하자면 컨베이어 벨트에서 병아리로 태어나 손바닥만 한 공간에 15마리가 붙어살며 먹고 15일 이후 목이 잘려 인간에게 치킨으로 공급되는 아기 병아리의 삶을 보라. 언젠가 AI이든 외계인이든 어떠한 존재와 계기에 의해 인본주의가 파괴되는 날이 온다면 인간 존재 고귀함의 파괴조차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또한 권력에의 의지이자 위버맨쉬는 니체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이지만, 이는 전체주의 속에서 전쟁과 폭력 유대인 학살과 같은 나치즘의 정신또한 낳았다. 이러한 사상적 한계로 근대철학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해야 하게 되었다. 인간 존재가 가벼운 것이 진리라면 인간은 삶의 무거움을 이고 살다가 이윽고 죽음으로써 가벼워진다.

그는 권력에의 의지를 긍정했지만 권력을 잃은 대중 또한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사상적 한계점에 부딪혀 정신병을 앓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니체는 어느 날 주인에게 채찍질로 학대당하며 피 흘리는 말의 목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평생 권력에 의해 피 흘리는 대중들의 억압을 바라보며 공감하며 괴로워하는 정식 착란에 시달리며 생을 마감한다. 



나는 이 신비로운 사상을 간략하게 텍스트로 얽어 이렇게 요약해 보았다.


영원히 자신의 인생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매 순간 긍정하고 살아가라.
자기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생각하며 확신하고 사랑하라.
인생은 가벼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진리인 이유는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성장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이 인간은 아무런 발전을 할 수 없다.


각자의 내면에는 각자의 사랑이 있다.

자기 자신의 내면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자기 자신만이 가장 잘 알 수 있다.


지식을 받는것이 아니라 지식을 사랑해야 함의 영역으로 들여놓을 때 창작이 가능하듯.
지혜를 받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 할 때 자신의 삶에 녹여낼 수 있듯.
사랑을 받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행하는 것의 영역으로 들여놓을 때 사랑을 알 수 있듯.
모든 사랑의 영역을 정의함에, 능동적인 형식으로 결정지으면 자신의 인생에 있어 많은 영역의 물음에 해답을 내릴 수 있다.


니체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철학자라서 앞으로 기록될 수 많은 작품해석에 니체가 자주 인용될 것 같다.


서문이 길었다! 자.. 이제 작품을 펼쳐볼 시간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사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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