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한 만년필 이야기
나는 왼손잡이기 때문에 딥펜을 쓰기가 어려웠으며 한때는 그 때문에 오른손잡이로 바꾸어 볼까 생각도 하였으니 결국 딥펜에 대한 욕구를 버리고 말았다. 왼손잡이 닙도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실제로 있긴 하지만 오른손으로 쓸 수 있는 펜촉만큼 종류가 다양하지도 않을 뿐더러 왼손잡이들은 대개 어릴 적 연필 잡는 법 교정을 받기보다는 오른손으로 전향하라는 힐난을 집중적으로 들은 탓에 은근히 쥐는 법이 제각각이다. 따라서 왼손잡이용 펜촉에 적합한 각도가 모두에게 맞는다고 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 다음으로 관심을 옮긴 것은 만년필이었고 첫 만년필을 사기 전에는 굉장히 긴장했다.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의 펜인데 이마저도 안 맞으면 어떡하나, 평생 볼펜과 중성펜만 쓸 수밖에 없을까 하는 걱정. 잉크 흐름상 같은 만년필을 써도 오른손잡이에 비해 살짝 굵게 나오는 느낌은 있긴 했지만 다행히도 쓸 수는 있었다. 다만 펜의 구조와 잉크 흐름상 오른손으로 쓰는 것이 여전히 자연스럽기는 하다. 그래도 딥펜과 달리 가능하다.
성능이 정말 좋다고 일컬어지는 펜이나 고가 만년필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 나중에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일지도 생각해 봤지만 일단은 쓴다. 언젠가 정말 좋거나 비싼 걸 써보게 되면 이 모든 펜들에 손이 안 가게 될까 궁금해지기는 한다.
Sailor Profit Young
내 인생 최초의 만년필.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고가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엄청나게 큰 돈을 쓰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8만원 정도였던 것 같으니 적은 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만년필 가격이 천차만별이란 걸 감안하면 그리 고가라고는 할 수 없다.
일단 깔끔한 외관이 좋았고, 일본 만년필이 그렇듯 얇게 나와서 좋았다. 굵은 펜을 원래 잘 안 쓰는 편이라 세필이 사고 싶었다. 비록 처음 샀을 때 닙 뽑기를 실패하는 바람에 너무 굵게 나와서 한 번 교환했던 기억이 있지만 왼손잡이로서 도전한 첫 만년필이라 의미있는 기억이었다.
후에 좀 더 알아보니 <세일러 스틸닙은 사지 말라!> 는 얘기가 흔하던데 이것이 바로 그 세일러 스틸닙이다. 이것만 쓰고 있을 때는 비교대상이 없으니 좋고 나쁘고도 없었지만 사실 다른 게 생긴 요즘은 잘 안 쓰고 있다. 미끌거리는 느낌이 강해서 손이 안 간다. 카웨코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는 항상 외출에 갖고 다닌 만년필이자 가장 오랜 시간과 여러 번의 여행을 항상 함께했으며 다이어리와 그림도 전부 이걸로 했던 펜이다. 첫 만년필답게도.
가벼운 편, 촉의 디자인이 예쁨, 화려한 취향이 아니라서 심플한 외관이 좋았다. 가진 것 중에 가장 세필이다.
요즘 즐겨 쓰지 않는다 뿐이지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비하인드로: 그냥 준 카트리지로 썼을 때보다 잉크 흐름이 좋다는 파크 큉커 잉크로 썼을 때가 훨 나았다.
Pilot Ergo Grip
세필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었던 때라 굉장한 세필이라는 추천을 보고 기대를 품고 샀다. 가격도 저렴했다. 만 원 이하로 구했다. 막상 받은 뒤로는 처음 이후로 거의 다시는 쓰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내 세일러 프로피트 영보다 두껍게 나왔기 때문이다. 구매 목적에 어긋나버렸으니 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저가형인 만큼 썩 견고하거나 좋은 느낌은 주지 않는다. 이 뒤로 몇 년을 새로운 만년필 없이 살았다.
만 원 이하.
Kaweco Classic Sport Fountain Pen
대망의 카웨코. 세일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나의 포켓 펜이다. 어쩌다 이 펜에 관심을 가졌을까? 그것만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보자마자 반했을 것이다. 영국 아마존에서 사서 영국에서 받았더니 한국
에서 사면 주는 틴케이스는 딸려 오지 않아서 좀 당황했다. 그래도 물건에 문제는 없었다.
카웨코는 독일 브랜드인데, Kaweco를 독일식으로 읽으면 카베코일 것이다. 확실히 일본 브랜드들과 달리 EF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얇지 않았다. 가장 놀랐던 것은 세일러 프로피트 영과 비교해 훨씬 부드럽게 써졌다는 점이다. 미끌거리기보단 사각사각에 가까운 느낌으로. 줄곧 집착해왔던 세필보다 훨씬 두꺼웠지만 외려 그 덕에 왜 사람들이 실처럼 가는 촉만 쓰지 않고 잉크가 듬뿍 나오는 촉을 쓰는지 알게 됐다. 세필과는 다른 맛이 있었다. 안정감과 잉크가 시원시원하게 나오는 일종의 쓰는 맛이랄까. 세일러만 가지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한 번 다른 것의 필기감을 좋다고 느끼고 나니 그 뒤로 쭉 세일러 프로피트 영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두꺼운 닙이라고 하면 2.0 이상의 두께를 가진 둔한 볼펜들을 떠올렸던 내게 새로운 체험을 하게 해 준 펜이었다.
이 만년필은 굉장히 가벼운 편이고 사이즈가 작아 휴대성이 좋다. 내 손가락을 제외한 손바닥의 높이와 비슷한 정도로 쓸 때는 캡을 뒤에 끼워서 써야 한다. 인터넷에서 보는 상품상세보다도 실물로 받았을 때 더 작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나를 사로잡은 건 이 펜의 아름다움이었다. 카웨코라는 브랜드명도 마음에 들었을 뿐더러 디자인부터 물건이 주는 느낌까지 내 취향에 부합했다고밖에 할 수 없다. 나는 원래 항상 갖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물건들, 틴케이스 같은 걸 좋아한다. 세일러 프로피트 영은 그러기에는 약간 컸다, 적어도 이 자그마한 카웨코보다는.
단점이라면 컨버터가 어쨰 죄다 별로라 카트리지를 사용하거나 빈 카트리지 통에 잉크를 주입해 사용해야 한다는 점 정도다. 돌려서 여는 식이라 캡을 여닫는 형식에 익숙하다면 답답하게 느낄 수도 있다. 나는 만년필 사용에 따라붙는 이런 번거로운 일들도 수행에 따르는 고난처럼 즐기는 편이라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시간을 들이는 물건이야말로 그 번거로움 때문에 특별해진다. 그럴 필요 없지만 굳이 선택해서 하는 일이야말로 의미를 부여한다. 특별한 것은 대개 그런 것들이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주변에도 선물한 적이 있는 현재 가장 좋아하는 펜.
자랑을 해 보자면 이런 펜 파우치도 가지고 있다. 카웨코 코인 펜 파우치로 스포츠 펜 두 개가 들어간다는데 클립을 끼우면 두 개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동전을 제외한 네임택과 유령 키링은 내가 따로 달았던 것이고 현재는 네임택만 남아 있다.
Platinum Desk Pen
쓰기 시험을 준비하던 때에 기왕 글씨 쓸 일이 많은 김에 좀 즐겁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샀다. 만 원이나 그 이하의 가격이다. 플래티넘 말고 파이롯트에서 나온 데스크펜도 있었고 둘이 거의 유사해 보였지만 플래티넘은 써 본 적이 없어서 이쪽으로 샀다. 본래 책상에 두고 세워놓는 펜 스탠드가 함께 나와있는 만큼 단품으로만 사면 뚜껑이 모나미 붓펜마냥 허접하긴 하지만 어차피 막 쓸 용도로 산 거라 상관없었다. 사각사각한 필기감으로 작문 연습을 좀 더 즐겁게 만들어 주었으며 소명을 다하고 난 뒤로는 지나친 필기량을 소화해서 그런지 숨을 거둔 만년필. 2번과 달리 본연의 용도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또 Writing 준비를 하게 된다면 살 생각이다. 펜 하나 바뀌는 걸로도 덜 고역인 때가 있기 때문이다.
EF지만 세일러 프로피트 영보다는 두껍다. 장점으로 책상에 두고 편하게 쓸 수 있다는 점과 사각거리는 느낌을 꼽는다. 닙 뽑기가 약간 있는 것 같았다.
만 원 이하. 전체적으로 길고 꼬리도 길다.
Kaweco Student 50's Rock Fountain Pen
카웨코 스포츠에서 좋은 인상을 받고 나니 다른 제품에도 시선이 갔다. 마침 필사용 만년필을 하나 갖고 싶었고 현재 가장 잘 쓰고 있는 만년필의 다른 라인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이 펜은 금장블랙을 고집하는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컬러풀한 만년필이다. 말인즉슨 색이 마음에 들어서 샀다는 뜻이다. 또한 가진 것 중에서는 가장 묵직하기도 하다.
막상 사고 보니 기대에 못 미친 점도 있긴 했으나 그건 스포츠에 너무 만족하고 있어서인 것 같다. 그래도 필사용으로는 여전히 이걸 쓰고 있으며 거의 그 용도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역시나 EF지만 세일러의 그것보다는 훨씬 두껍고 캡을 돌려서 여는 형식이다.
만족도: 스포츠>이것. 가격은 이쪽이 두 배 정도.
Platinum Meteor Fountain Pen
구매 동기는 오로지 산리오와의 콜라보다. 마이멜로디 만년필이라니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만 원 이하의 가격으로 구매했고 저 가격에 카트리지+컨버터까지 준다. 패키지가 귀여운 편. 단 카트리지는 안에 든 잉크가 좀 별로였다. 굳이 따지자면 만년필보다는 중성펜에 가까운 필기감이고 지금도 거의 중성펜 느낌으로 쓴다. 두어 번 만 원 이하의 만년필을 써 본 경험과 가격 특성상 아무 기대가 없었는데 생각보다는 쓸만하다. 만년필보다는 중성펜 느낌으로. 색이 다양하고 저렴한 것이 장점. 닙이 귀엽다.
만 원 이하.
만년필을 원하게 된 이유는 한 번 쓰고 버리는 펜 대신 꾸준히 쓸 수 있는 펜을 원해서였다. 좋아하는 종류의 볼펜을 계속 교체한다 해도 결국 연속성을 느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물건에는 줄 수 있는 애정도 한정되어 있다. 대체할 수 없는 것을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들고 싶었다. 각인이 된 펜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유는 내 이름을 박기 싫었던 것도 있고 새겨진 이름 없이도 그것이 내게서 대체 불가능하기를 원해서였다. 원래 이런 성격인 탓에 어쨌거나 만년필을 고른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쓰여지는 모든 글씨가 내가 몇 년씩 지닌 펜들에서 나온다는 건 기분 좋은 느낌을 준다.
관리 측면에서의 까다로움도 분명히 있다. 3일에 한 번씩은 써주어야 잉크가 마르지 않는다고 하는데 매일 일기를 쓰는 펜 말고는 꽤나 자주 놓친다. 어쩔 수 없지 생각하면서 펜 매니아 분들이 몇십 개씩 관리하시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느낀다.
만년필을 사기 전에 온 인터넷에 왼손잡이, 왼손잡이 펜촉, 왼손잡이 만년필 등의 키워드로 검색해서 댓글 한 줄이라도 보곤 했는데 이 글도 그런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펜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오히려 살짝 돌려 쓰는 것이 낫다. 또한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된 분도 이런 얘기까지 나올 줄은 모르셨겠지만 그 분께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